다이어리, 갈등
매년 이맘때가 되면, 갈등에 빠집니다. 계획을 잘 실천하기 위한 물리적인 도구들 중 그 어느 것이라도 사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작년에도 서울에 들른 김에 교보문고에서 잘 만들어진 탁상용 달력을 샀지만 채 열자도 쓰지 않은채 봉인, 계절에 관계없이 동면에 빠져 있다가 플라스틱 받침을 남겨 두고는 폐지처분되어야 할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그것 뿐만이 아닙니다. 새해가 일주일이 채 지나기 무섭게 세일해서 얼씨구나 좋다고 샀던 몰스킨 주간 다이어리도 처음 한 달을 쓰지 못한 채 계속 가방에 담긴채로 전반기에는 학교에, 후반기에는 회사에 저와 함께 출퇴근했습니다. 단지 차이점이라면, 저는 일을 하고 다이어리는 그저 왔다갔다만 한다는 것…
왜 이럴까, 저의 이런 작심삼일성 태만함에 대해 곰곰이 자가 분석을 해보면 원인은 우선 이곳의 생활이 그렇게 변화가 없고 또한 반드시 해야만 되는 일이면 아직까지는 쓰지 않더라도 대강 기억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저는 싸가지 없게도 늘 그렇게 생각합니다. 무슨 회사 CEO가 아닌 이상 수첩에 빽빽하게 쓰더라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일이 더 많을 것이라구요. 그리고 그렇게 있는 생각, 또한 없는 생각 다 해가며 그렇게 빽빽하게 쓰는 시간에 차라리 실제로 해야만 하는, 혹은 할 수 있는 일 하나를 더 하는게 훨씬 생산적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다이어리가 필요한 복잡한 삶을 살고 싶은 욕망의 불꽃이 아직까지는 다섯살배기 생일케익의 촛불크기만큼은 남아 있기 때문에, 또한 조금이라도 더 꼼꼼하고 계획된 채로 살고 싶기 때문에 올해도 못 이기는 척 다이어리 하나 정도는 사게 될 것 같습니다. 아마도 내년 이맘때 또 텅텅 빈 다이어리를 보면서 가책하겠죠. 올해도 해냈구만! 하구요.
사족: 스노우캣 다이어리(……빈 칸일랑은 각자의 의견으로 메꿔주세요, 괄호처리는 ‘임금님 귀는 당나기 귀’ 성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한 특수효과입니다)
# by bluexmas | 2005/12/30 14:15 | Life | 트랙백 | 덧글(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