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ign Over Me(2007)
9/11 이후 5년 반, 이제 애도의 유통기한도 슬슬 끝나가는지, 9/11을 직간접적으로 다루는 영화가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저는, 아픈 기억일수록 묻어 두는게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9/11을 소재로 한 영화는 별로 볼 생각이 없었습니다. 얘기가 삼천포로 빠지는 것 같지는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참사에 대한 지나친 기념화를 그렇게 달가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널리고 또 널린 유태인 대학살에 대한 기념시설들입니다. 물론 전쟁은 있어서는 안될 일이고 거기에 따르는 희생은 더더욱 비참한 일이긴 하지만, 그 아픔을 기리기 위한 기념시설들이 역사의 강제적인 주입 내지는 상업화를 통한 이익 추구를 한다는 생각이 들 때에는 과연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양적인 팽창이 추모에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심을 거둘 수가 없습니다. 아무도 역사를 부정하지 않고, 이미 사람들은 알만큼 다 아는데도 세계 곳곳에는 또 다른 기념시설들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경향이 계속해서 심해지면, 저의 부정적인 견해는 극에 달해, 결국 강한자들의 희생만이 기억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어리석은 생각마저 하게 됩니다.
하여간 그렇게 이런 영화를 볼 생각이 없었지만, 그래도 호기심은 아주 죽지 않았던 듯, 보려고 기대해왔던 Shooter가 별로일 것 같다는 느낌을 받고 나서, 저는 이 영화로 방향을 틀게 되었습니다. 오랜만에 Don Cheadle(저는 언제나 그를 Boogie Night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새 삶을 꾸리기 위해 애쓰지만 은행에서 융자도 거절 당하고 지었던 그 불쌍한 표정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서…)도 볼 겸, 가끔은 쏘고 죽이는 영화말고 평범한 드라마도 좀 볼 겸 해서… 그렇게 별 기대도 하지 않고 본 이 영화는 적어도 그 없던 기대의 두 배 정도는 되는 영화보는 즐거움을 안겨 주었습니다.
언젠가는 포르노 배우였던 돈 치들은 그렇게 혹독한 대가를 치루고 나서야 직업에 알고 보면 귀천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회의 암묵적인 공감대의 냄새를 맡고, 이번 영화에서는 쏠쏠하게 돈 잘 버는 맨하탄의 치과 의사로 등장합니다. 뭐 돈도 잘 벌고 예쁜 마누라와 딸들도 있으니 그의 삶에는 부족함이 없는 것 같지만, 알게 모르게 그의 어깨에는 허락되지 않는 융통성에 대한 욕구가 무겁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뭐 말하자면 중년의 위기감(Midlife Crisis)와 같은 것이겠지요. 정신없이 살다가 문득 뒤돌아보니 자신이 어느새 감정의 인간이 아닌 기능의 인간이 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는 슬픈 현실… 그리하여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기력의 그늘이 깃든 호흡을 고르던 터, 그는 마누라와 딸 셋 모두를 9/11로 읽은 후 연락이 끊긴 치대 동기이자 기숙사 룸메이트인 Charlie(Adam Sandler 분)을 길에서 마주치게 됩니다. 자신과 같이 화이트 칼라의 길을 걷다가 빌어먹을 테러로 인해 엄청나게 망가진 찰리의 삶에 발을 들여 놓기 시작하면서, 그는 자신의 삶을 한 발짝 물러서서 볼 기회를 가지게 됩니다.
영화는 같은 대상의 상실을 경험한 사람들이 드러내는 각기 다른 반응이 이해 관계를 놓고 어떻게 얽히는지, 그리고 그렇게 얽히는 과정에서 인간의 본성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보여주려 합니다. 그렇게 가족을 순식간에 잃어버린 찰리는 자신의 행복한 과거를 부정하며 정신적으로 퇴행된 삶을 사는데, 부모도 일찍 세상을 떠난 그에게 유일한 가족임을 자청하는 처가 부모 내외는 끊임없이 그를 접촉하며 그의 삶을 본 궤도로 올려 놓는데 도움을 주겠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 삶의 본 궤도라는 것은 과연 누구에 의해 정의된 것이고, 누구를 위해 존재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자신의 삶이 다른 사람에 의해 정의된 궤도로 선회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찰리는 계속해서 그들을 피하고, 그러는 와중에서 처가 부모 내외는 결국 그가 괜찮아지는 것이 그를 위함이 아닌, 바로 자신들을 위함이라는 이기적인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기심은 결국 그가 겪고 있는 고통이 단지 대상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의 고통과 같을 것이라고 단정짓는 어리석음에서 발현된 것이므로, 당사자에게는 계속해서 고통만을 안겨줄 뿐입니다. 고통은 대변될 수 없는 것일텐데, 그들이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의 대변자처럼 행세하는 것을 보는 자체만으로도 그가 겪고 있는 고통은 배가될 수 있을테니까요. 그리하여 찰리는 영화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처가 부모에게 “당신들도 고통받고 있다고 말하지만 적어도 당신들은 서로를 잃지 않았잖아” 라며 이렇게 벌어지고 있는 고통의 강도에 대한 논쟁이 얼마나 자신에게는 어이없는 것인지를 알립니다(제 개인적인 상실의 경험에 비춰봐도 충분히 공감할 만합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평화를 위해 멀쩡해지는 것은 어느 강도 이상의 고통에 이르면 불가능하더군요).
뭐 이렇게 어쩌면 뻔하디 뻔한 얘깃거리-아마도 10년안에 영화 주제로서는 클리셰의 왕에 손쉽게 등극할 듯한-를 다루면서도 제가 이 영화에 싸가지없게도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다면, 이 영화가 그 뻔하고 뻔한 영화들처럼 찰리가 정신 차리고 행복을 찾는 모습을 보여주는데에는 애초에 관심조차 없었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이 영화는 아담 샌들러의 것이라기 보다는 돈 치들의 것입니다. 물론 영화는 계속해서 찰리와 그가 겪은 상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정작 영화가 궁극적으로 보여주고 싶은 것은 그의 삶에 올 변화 보다는, 찰리의 삶에 발을 들여놓게 됨으로써 변화하는 앨런(돈 치들의 극중 이름)과 그 주변인들의 삶인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늘어놓는 이야기의 목적이 그것이었음을 관객이 알아차리는 순간, 영화는 많은 부분에 상상력이 개입할 여지를 남기며 발걸음을 돌려 막 뒤로 사라집니다. 물론 평범한 미국인들이 실망하지 않도록(흥행에 직결 되니까) 약간의 가족주의 양념을 뿌려 놓고 떠나는 것은 잊지 않습니다.
요즘 뭐 두 시간 이하면 영화 취급 못 받는다고 누가 얘기하도 하고 돌아 다니는지, 별 이야깃거리 없어 보이는 이 영화도 두 시간을 훌쩍 넘깁니다. 그러나 영화는 막판 법정에서 벌어지는 약간의 억지를 빼놓고는 별로 흠잡을 데 없는 매끈한 이야기를 선사합니다. 매체에서는 아담 샌들러의 연기 변신을 놓고 이런저런 얘기가 많은 것 같은데, 저는 그를 단 한 번도 좋아해본 적이 없고, 따라서 거의 본 영화가 없기 때문에 솔직히 연기나 역할에 대한 별 편견 내지는 사전 지식 없이 영화를 보았습니다.
영화의 제목 ‘Reign Over Me’는 밴드 The Who의 Quadrophenia(1973)의 수록곡 ‘Love, Reign O’er Me’에서 차용한 것입니다. 이 곡 말고도 영화에는 7,80년대의 록 클래식이라고 할만한 곡들이 삽입되었는데, 이 곡들은 현재 40대로 등장하는 주인공들에게 회상의 매개체로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합니다(고백하건데 요 부분은 토요일 저녁에 파파존스에서 피자를 기다리는 동안 읽은 USA Today의 영화 리뷰를 읽고 그렇구나, 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Only love
Can bring the rain
That makes you yearn
To the sky
Only love
Can bring the rain
That falls like tears
From all high
Love
Reign o’er me
Rain on me
Rain on me
– The Who / Love, Reign O’er Me 中
# by bluexmas | 2007/03/26 11:51 | Movie | 트랙백 | 덧글(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