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학력 위조가 필요해

요즘 우리나라엔 연예인들의 학력 위조가 큰 화제가 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다 보니, 저도 학력 위조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부분 없는 학력을 만들어내서 문제라던데, 저는 쓸데없는 것들을 좀 걷어 내는 위조가 필요한 것 같더라구요.

사실 저는 뭐랄까, 박사학위과정의 낙오자와 같은 인생이에요. 미국에서 건축 면허를 따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인 건축 석사(Master of Architecture) 과정을 2년 만에 마치고, 바로 건축학 석사(Master of Science in Architecture)라는 탈을 쓴 박사 과정의 course work에 들어갔었죠. 이게 뭐 사실 알고 보면 웃기는 건데, 석사 과정이라고 박사하고 싶은 학생들을 뽑아 놓고 1년 있다가 한 번 더 추리는 과정을 거치거든요. 결국 그걸 악용해서 1년 동안 학교 돈으로 놀다가 석사 하나를 공짜로 더 받아 가지고 도망치는 학생도 있기는 하지만(누구라고 콕 찝어서 말은 못 하겠지만…).

부모님, 좀 더 정확하게는 아버지의 영향 내지는 세뇌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공부를 해서 박사 학위를 받고 좀 더 구체적으로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 외에 다른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사실 건축을 공부해서 대학원까지 왔지만, 디자이너가 된다거나 지금처럼 회사를 다니게 될 것이라고는 꿈도 꿔 본 적이 없었죠. 적어도 대학원 1년차까지는… 저의 꿈-이라는 단어는 이제 30대 중반이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단어 같기는 하지만-이랄까, 하여간 뭐 그런 것은 이론가가 되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러다가 대학원도 2년 차에 접어들고 삐걱거리는 개인사를 비롯한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악화일로에 접어들자 그야말로 인생 전반에 회의가 느껴지기 시작하더군요. 일단 가장 큰 회의는 박사를 언젠가 하더라도 이렇게 바로 가서는 안된다는 생각이었죠. 아무리 제가 이론가가 되기를 꿈꿨다고 해도, 건축은 일단 굉장히 물질적인 학문 분야인데, 그 물질적인 것들을 생산해 내는 과정을 전혀 모르고서 과연 제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굉장히 회의적인 생각이 들더라구요. 또한 현실적으로 제가 다니던 학교는 다녔으니까 받아준다는 것을 빼 놓고는 다른 학교에서 저처럼 경력이 일천한 외국 학생을 받아줄리도 만무했구요.

거기에 공부를 한다는 행위 자체에 대한 회의 또한 만만치 않았죠. 물론 제 돈으로 제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는 것이니까 다 제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기는 하겠지만, 과연 4-5년이라는 길고 긴 전문화 과정을 거쳐서 제가 습득한 지식을 대체 어디에 어떻게 써 먹을 수 있을지 대체 감이 안 잡히더라구요. 박사 과정에서 하는 공부는, 그게 무엇이든지 엄청나게 전문화된 분야인데 내가 하려는 것이 정말 이 세상살이에 필요한 것인지 그 존재가치의 정당화를 만족할 만큼의 강도로 할 수가 없었던 것이죠.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가장 중요한 요소였을지도 모르는데, 발을 담기 전에 막연하게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서의 활동이 가능할 것으로 보였던 학문의 세계라는 것이 알고 보니 제가 그렇게 몸 담기를 원하지 않았던 일반 사회의 조직들보다 훨씬 더 강한 유대감 같은 것들로 뭉쳐 있었다는 사실… 예나 지금이나 저는 꼭 필요한 집단이 아니면 그 어디에도 몸 담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으로 자라왔는데, 저는 그런 분위기에 도저히 적응할 수 없었죠. 게다가 그렇게 공부를 하고 싶다고 꿈 꾸면서 자라왔던 어느 순간에도 박사 학위 같은 것들을 신분 상승이나 개인의 지위를 나아 보이게 하는 도구로 사용하리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게 알고 보니 그런 것이 아니었더군요. 이게 무슨 얘기냐면, 학교에서 아무리 오래 공부한다고 해도 그게 인격의 개선 따위를 가져 오는 것이 절대 아닌데, 혹자는 뭐 그걸 그런 수단으로도 믿더라는 사실(좀더 줄여서 말하자면 가방끈의 길이가 인격과 비례 안 한다는거죠)… 그러한 상황이 그 당시 저를 괴롭혔던 개인적인 문제와 맞물리게 되자 저는 더 이상 그곳에 몸을 담고 싶은 생각이 없더라구요. 뭐 다들 다른 인생이니 제가 상관할 바도 아니고 또한 가치판단의 자격도 없지만, 때로 열정도 commitment도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고학력 실업자와 같은 정신적 남루함을 풍기면서 학교를 다니는 것을 보니 뭐랄까, 정말 오만정이 다 떨어지더군요(물론 이것은 일반적으로 공부하시는 분들을 겨냥해서 하는 얘기가 아니니 오해의 소지는 없기를 바랍니다).

뭐 이렇게 저렇게 상황을 종합해 본 결과, 그런 결론을 얻은거죠. 언젠가 다시 이 길을 걷게 되더라도 지금 이런 모습으로는 안 되겠다… 이것은 그야말로 배움의 끝인데 그때는 도저히 그런 몰골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길을 걷고 싶지 않았던 것이겠죠. 저는 이래저래 완전히 만신창이 누더기였으니까요(그레이트 마징가가 깜짝 출연해서 다 죽여버리기 직전의 마징가 몰골정도랄까…).

그리하여 두 번째 석사 과정의 두 번째 학기엔가, 교수를 찾아가 졸업하겠다고 했죠. 위에서 말한 것처럼 학교에서 일을 하면서 학비도 받았고 또 수업 듣는답시고 스튜디오도 없는 한가한 생활을 1년 동안 해서 그렇게 아쉬운 건 없더라구요. 그리고 바로 직업 전선에 뛰어들자마자 회사에 취직되고, 졸업하고 1주일 후에 회사 출근… 그리고 벌써 여기까지 왔네요.

하여간, 제가 회사에 다니고 일을 하고 또 면허를 따는데 두 번째 석사 학위는 사실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그래서 저는 가끔 학위 얘기가 나오면 그렇게 농담을 하죠. 하나는 너희들이 다 알다시피 건축 석사고, 나머지 하나는 Master of Cooking & Housekeeping이라구요. 사실은 졸업하고 3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인데 액자 값도 비싸고 해서 두 졸업장 모두 그 원통형 케이스에서 꺼내어 지지도 않은 채 지하실 어딘가에서 뒹굴고 있어요. 이러다가 졸업장 잃어버리면 아예 석사 안 받은 걸로 쳐줄라나…

 by bluexmas | 2007/09/12 15:04 | Life | 트랙백 | 덧글(10)

 Commented by blackout at 2007/09/12 21:47 

부모님이 돈 대주셔서 받은 학위인데, 이쁜 액자에 넣어서 걸어놓으세요…^^. 저는 취직 하기 싫고 미국에서 살고싶어서 학위한거라, 사실 별로 큰 고민은 없었거든요.

 Commented at 2007/09/12 21:54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07/09/13 13:04 

blackout님: 말씀드렸다시피 미국의 액자값이 너무 비싸서…후에 박사라도 하게 되면 그때는 IKEA액자라도 사서 넣어 놓게요.

비공개님: 알려드린 정보가 도움이 되셨기를…

 Commented by intermezzo at 2007/09/13 13:26 

액자값…오늘 회사에서 사람들하고 이야기하다가 액자값 이야기가 나왔어요. 옆자리 사람이 얼마전에 집에 걸어놓을 그림을 샀는데 액자값이 그림값이랑 거의 같았다나요;;; 다들 액자 비싸다고 난리더라구요. 서강대 앞골목 액자공장에 가서 액자 맞춰 쓰던 저로서는 이동네 액자값이 정말 감당이 안되어요;;

 Commented at 2007/09/14 06:1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07/09/14 14:03 

비공개 2님: 학계는 알고 보면 참 무서운 곳이지요~ 그리고 저는 잘때 꿈을 너무 많이 꾸기 때문에 지긋지긋해서 그런 얘기를 한 것 같은데요? 믿거나 말거나~

intermezzo님: 미국에선 정말 액자가 너무 비싸서 그림의 떡이 바로 액자라니까요.

비공개 3님: 사치는 아니겠죠… 저도 참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게 참 너무 민감한 화제잖아요. 사실 저도 준비한답시고 깝죽거리고 부터는 친구들 잘 안 만났어요. 민감한거 건드리기 싫어서요. 어쨌거나 비공개님께서 생각하시는게 잘 이루어졌으면 좋겠고, 혹시 저한테 궁금한게 있으면 물어보세요…

 Commented by 소냐 at 2007/09/16 12:08 

아아, 정말 몇번이나 읽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지독하게 공감이 되는 부분이 있어서 말이죠. “열정도 commitment도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고학력 실업자와 같은 정신적 남루함을 풍기면서 학교를 다니는 것” <– 정말이지 꼭 저의 얘기는 아닐지라도 이 한줄은 제가 공부를 계속하는 것과 관련하여 고민하는, 싫어하는, 좋아하는.. 그 모든 것들의 엉겨붙은 총체를, 제가 저 밑 어딘가에 처박아 놓고 잊어버린 척 하고 있는 것들을 단숨에 떠올리게 하는군요…

꿈이라.. 서른 중반이면 (BTW 저야말로 서른 중반이 다 되어가고 있죠) 가지기 어려운 것일까요? 전 아직도 덜 자란게 분명해요.. 아직도 꿈이란 풍선의 실을 잡고 차마 날려보내지 못하고 있으니…

 Commented by bluexmas at 2007/09/17 08:54 

소냐님: 제 글을 읽고 고민하시면 제가 너무 슬퍼질텐데요… 원래 공부한다는 건 그냥 한 편으로 외로움을 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사실 공부를 한다는 것에 대해 고민이 많았거든요. 그만큼 그게 저에게 소중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때로 너무 아무런 생각도 없어보여서 그게 싫었던 것이죠. 지금 돌아보면 뭐 그래요. 그들은 그들 나름의 삶을 사는데 제가 굳이 싫어하고 좋아할 이유가 없죠.

저도 아직까지는 서른 초반,이라고 억지로 말할 수 있는 나인데, 사실은 꿈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꿈이 있으니까 ‘내가 꿈을 가져도 될까…?’라고 고민하는 것이겠죠?^^

 Commented by HiME7519 at 2007/10/24 14:13 

서른넘은나이에 근거없는 자신감에 넘쳐 다시 공부시작하고서 요즘 많이 힘들었는데. 글 읽고 고민도 돼지만 기운도 나네요..꿈을 움켜쥐고 있기엔 높은 나이라고들 하지만 인생은 서른부터!!! 아닌가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07/10/25 12:10 

안녕하세요? 이 글은 쓴지 꽤 된건데… 자신감을 가지고 공부하신다니 다행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