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한숨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서 스트레스를 쌓아 놓고서는 그 스트레스를 풀겠답시고 집에 오자마자 컴퓨터 앞에 앉는 저라는 인간의 삶은 대체 얼마나 가련한 종류의 것일까요? 오늘은 귀가가 늦었어요. 데드라인 덕분에 운동도 못하고, 피자로 저녁을 때웠답니다. 지난 주말에도 피자를 시도했다가 결국 실패(…그래서 포스팅이 안 올라오는 것이랍니다. 월요일이나 화요일에 토요일 음식에 대한 포스팅이 안 올라오면 그건 곧 그날 만든 음식이 실패였음을 의미하는 것이죠)하고 말았지만, 그것도 결국 파파존스보다는 먹을만한지라 이제는 뭐 피자 먹는다는 이유로 야근이 즐겁지도 않아요.
하여간 각설에 각설을 거듭해서… 대학교 새내기 시절 언젠가, 강의 사이의 쉬는 시간에 남학생들이 바글바글 모여서 담배를 죽어라 피우는 와중에 그 수적인 열세만으로도 꽃 취급을 받던 여학생(저는 공대출신이거든요, 거 왜 왕십리에 있는 모 공대라고…)들 가운데 하나가 물어보더군요. 대체 왜 남자들은 담배를 피우는 것이냐고… 그러자 부산출신 동기 하나가 그렇게 대답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해요. ‘한숨쉬고 싶어서 피운다’고.
뭐 거의 십 오년이 지난 이 마당에도 그 대화의 장면이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을 보면, 저도 아마 그의 의견에 어느 정도는 공감을 했던 것 같아요. 어차피 담배 연기를 들이마셨다가 내뿜는 과정은 한숨을 쉬는 것과 같은 깊은 들이마심과 내쉼을 요구하니까요. 뭐 그런 와중에 은근슬쩍, 그간의 고민으로 밀렸던 한숨을 살짝 쉬어주는 것이죠. 양다리 걸치다 들켜서 고민하든, 레포트가 밀려서 고민하든… 어쨌든.
아, 왜 뜬금없이 담배얘기를 꺼내냐면, 저와 같은 층에서 일하는 ‘존경하는’ 두 선배님들 가운데 한 분은 뭐 지속적인 애연(내지는 끽연喫煙… 왜 이 ‘끽喫’ 이라는 단어는 담배를 피운다는 느낌과 너무도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드는걸까요? 아마도 저만 그런 것이겠죠?)가여왔고, 저랑 같이 일하는 선배는 저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담배를 끊었는데, 요즘 다시 담배를 피우시더라구요. 아마도 이제 거의 2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일텐데…
네, 저도 대학교 새내기 시절부터 재작년 이맘때쯤 까지 흡연가였죠. 뭐 항상 담배가 필요한 사람은 아니었구요, 그냥 어쩌다 피우던, 말하자면 Occasional Smoker정도였겠죠. 흡연의 시작은, 뭐 성경말씀을 인용하자니 좀 죄송스럽지만 지극히 미미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참 걱정 많으셨던 부모님은 고등학교때에도 대학가서 담배 피우면 안 된다는 말씀을 너무 많이 하셨더랬고 그러한 말씀은 오히려 반대로 저의 흡연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했죠. ‘담배가 뭔데…?’ 와 같은, 금지된 영역에 대한 지극히 원초적인 호기심 같은 것이었겠죠(뭐 고등학교 때는 담배 피운 적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대학 합격증을 받으러 왕십리로 향했던 그 날, 합격증을 받아 쥐고는 매점에서 88 내지는 글로리를 사서 피워보았죠. 에, 뭐 별거 아닌데…라는 반응을 보였던 기억이 나네요.
뭐 그 이후로 재작년까지, 니코틴에 대한 별 다른 금단증상 없이 담배를 야금야금 피워왔었어요. 군대 시절에는 하루에 한 반 갑 정도까지 피우기도 했지만, 언제나 1/4갑 정도를 넘긴 적은 없었죠. 그러다가 서른이 될 즈음에 내 몸이 니코틴에 대한 금단증상을 보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죠. 그러니까 말하자면 자꾸 피우고 싶어지는 것이죠.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그리하여 그 즈음에, 저는 더 이상 이 담배라는 녀석에게 얽매이지 않기로 마음을 먹고, 그냥 딱 끊었어요. 어느 날, ‘아, 이게 끝이다.’ 라는 생각과 함께요. 딱 한 번 실패해서 작년 이맘때쯤 잠시 피웠었지만, 뭐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어요. 얽매이고 싶지 않다는, 그리고 이게 건강에 나쁘다는 생각 정도면 사실 담배 따위 멀리하는 것은 저에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제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것은 아니겠죠. 그러나 적어도 제가 받는 스트레스가 담배 한 두 대 피우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아니까, 이제는 뭐 웬만한 스트레스에 담배 생각이 날 이유는 없어요. 담배를 습관처럼 피우면, 스트레스를 조금만 받아도 바로 머리 속에서 담배 생각이 뭉게뭉게 피어오르죠. 저도 겪어봤으니까 알거든요. 그러나 그때는 이미 내가 담배를 피우는게 아니고 내 몸 속을 돌아다니는 니코틴이 담배를 부르는 것이겠죠. 어차피 스트레스는 고통인데 그걸 또 다른 고통으로 삭히고 싶지는 않아요. 게다가 저는 그렇게 담배가 잘 받는 사람도 아니거든요. 그래서 담배를 피우면 지금처럼 운동을 할 체력적인 여유도 없을거에요.
하지만 저는 술은 마셔요. 제 블로그에 자주 들르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보통 일주일에 와인 한 병 정도는 마시구요. 오늘처럼 야근에 쩔어서 들어온 날은 보드카를 마시곤 하죠. 뭐 아주 가끔 어쩌다가 담배 한 두 대 정도 입에 물어 볼 수는 있겠죠. 그러나 저는 정말이지 요즘처럼 무엇인가 꼭 해야 되는 것에 얽매이기를 싫어해본 적이 없어서, 담배를 다시 습관적으로 피우지는 않을거에요. 요즘은 잠자고 밥 먹는 것 외에 그 어느 것도 습관으로 가지기 싫어하거든요. 커피도 하루 걸러 한 잔씩 마시는데, 이것도 아예 끊고 싶거든요.
저는 뭐…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강박적이다 싶을 정도로 건강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지만, 그게 뭐 필요 이상으로 오래 살고 싶기 때문은 아니에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제가 어떤 인간으로 기능하느냐가 아닐까 싶어요. 쓰레기 같은 음식들 안 먹고, 일주일에 서너번씩 두어시간 운동하고, 규칙적으로 잠을 자더라도 가끔은 하루하루가 너무 버거운 요즘 현실에, 한 시간에 한 번씩 니코틴을 혈관에 불어 넣어서 저를 더 힘들게 만들고 싶지는 않거든요. 그저 아주 짧은 시간동안은 기분 좋겠죠… 그러나 어차피 단기간을 위한 해법 short term solution은 저의 취향이 아닌걸요. 그래서 저는 오늘도 담배를 피우며 긴 한숨을 쉬는 선배들에 둘러싸여서 그저 짧은 한숨을 쉬는 수 밖에 없었답니다. 그래도 저는, 이 정도의 유혹에는 휘말리지 않는 저 자신의 이런 부분이 마음에 드는걸요.
# by bluexmas | 2007/10/11 14:13 | Life | 트랙백 | 덧글(9)
비공개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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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항상 주위분들에게 금연을 권고하죠. 건강도 좋지 않고, 여러모로 좋진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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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 2님: 건축과에는 여학생도 많고 또 담배도 많이 피워요. 제가 알던 학교 안팎의 여자애들은 거의 80%가 담배 피우거든요. 그래서 저는 뭐 여자가 담배를 피워도 아무런 느낌이 없죠. 오히려 여자가 담배피운다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더 이상한거 아닌가요?
blackout님: 겉멋이 평생가는 사람도 많잖아요.
비공개 3님: 교육공학과일까요? 저도 동문회비는 안 내요.
이비님: 콘스탄탄 보았답니다. 매트릭스 후속작으로는 영 아니었어요.
D-cat님: 어차피 평생 피울 생각도 없었어요. 귀찮잖아요. 돈도 장난 아니구요.
비공개 4님: 앗, 제가 본의 아니게 정답을 맞췄군요. 얼른 기운 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