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생환

.밤새 진단프로그램을 돌리느라 감은 눈으로는 옆 방의 컴퓨터 불빛이 새어 들어오는 것을 느끼고, 감지도 못하는 불쌍한 귀로는 컴퓨터 돌아가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어요. 언제나 그렇듯이 스트레스가 목구멍까지 차오르면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선잠을 자는 동안 저 그다지 유쾌하지 못한 빛과 소리로 인해 꿈을 꿀 수 밖에 없었고, 그 꿈의 내용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하드 또는 사진파일을 찾아 떠나는 지옥행 모험- 뭐 그런 것이었겠죠. 누구처럼 날개달린 신발을 신고 실타래를 풀고 또 감아가며 땅 속 깊은 곳 또는 미궁을 헤메였는지, 신령님이 나타나서 금하드나 네 하드냐 은하드가 네 하드냐 아니면 청량리로 갈꺼냐 물어봤었는지 뒤를 돌아보면 옆구리에 안고 있는 사진파일들이 다시 땅 속 깊은 곳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기 때문인지 아니면 소금기둥이 되기 때문인지 몰라도 누구에게서부턴가 절대 뒤돌아보지 말라는 경고도 받았던 것 같아요. 하여간 그동안 읽었던 모든 신화세계가 떡지듯 뭉쳐 형성된 세계의 구석 어딘가로 기억들을 찾아 떠났던 여행에 대한 꿈을 꾸고는 아침에 일어나서 진단을 마친 컴퓨터를 재시동시키자 죽어있던 하드가 잠시잠깐 옆구리의 문을 열었고, 저는 지각을 불사하면서 일단 사진들을 그동안 내장 드라이브에 나눠 옮겨 복사했죠. 그리고 저녁에 집에 돌아와보니 하드는 다시 옆구리의 문을 닫고는 벙어리처럼 앉아있네요. 하여간 무슨 대가를 치뤄서라도 찾아오기로 굳게 마음 먹었던 기억들은 일단 살아서 돌아왔고, 저는 새 컴퓨터를 사기로 마음먹었답니다. 이건 그러니까 절반짜리 해피엔딩의 보고서인 셈이죠.

 by bluexmas | 2008/04/24 13:30 | Life | 트랙백 | 덧글(5)

 Commented by nippang at 2008/04/25 01:23 

이야기를 읽다가 불현듯, 함께하던 순간의 기억을 공유할 대상을 잃는 일이기때문에 사람과 어떤 방식으로든 이별하는 것이 힘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컴이 번개를 맞아서 딸의 사진과 휘갈기던 많은 그림들을 되살리지 못했을때 인간이 끊임없이 손, 촉각으로 만져지는 형태로 뭐든 만드는 까닭은 이런걸까 떠올리면서 견고하고 견고해서 나보다 더 오래갈만큼 견고한 저장장치를 망상. ^^

 Commented by bluexmas at 2008/04/25 12:52 

요즘처럼 매체가 발달하면 기억하려는 노력도 적어지는 것 같아요. 옛날에는 전화번호도 다 기억하고 다녔는데 핸드폰이 나온 이후로는 채 다섯개도 기억하지 못하죠. 저는 더 오래가는 저장장치보다 제 자신이 더 기억하려고 노력했으면 좋겠어요.

 Commented by intermezzo at 2008/04/26 12:54 

전 첫 핸드폰을 가졌을떄는 거의 100명의 핸드폰번호를 외웠답니다…동아리 연락부장이었는데 문자를 보내려면 번호를 외워야만 했거든요. ㅋㅋㅋ 이름으로 찾아보내는 기능이 없어서….그러다 몇년후에 문자를 보낼떄 이름으로 찾아보내는 기능이 있는 핸드폰으로 바꾸었는데…전화번호 잊어버리는 건 순식간이더군요 ㅎㅎ

 Commented by bluexmas at 2008/04/28 13:11 

그렇죠? 저처럼 전화 걸일이 없는 사람은 더더욱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요. 메일도 요즘은 다 주소록에 저장되어 있고… 그럼 그 기억하려는 노력은 대체 어디에다가 써야 될까요?

 Commented at 2008/04/29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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