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 내기 좋은 아침
오랜만에 맞는 너무나도 상쾌한 아침이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났으니, 다시 새 나라의 어린이가 될 수는 없을까? 아냐, 그러면 술을 못 마시니까… 라는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하면서 달리기까지 했다. 어제 못한 달리기…아침의 싱그러운 공기를 가른다는게 과연 이런 기분이구나, 라는 걸 정말 태어나서 처음 안듯한 기분이었다. 아침 공기가 너무 차가워서 뛸만큼 뛰었는데도 땀이 잘 안 났다는게 이 너무나도 상쾌한 옥, 아니 아침의 티였다. 늦지 않게 아침을 먹고, 옆구리가 찌그러진 차를 남쪽으로 몰았다. 아, 상쾌해… 너무 상쾌해서 회사도 제끼고 어딘가 놀러가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적어도 페덱스 영업소에 들르기 전 까지는.
5월에 접어들어 몇 가지 사야만 될 것들이 있었는데, 여느때 같으면 회사로 보내라고 했을 것을, 이번에는 내키지 않아서 집으로 배달되도록 한 것이 이 상쾌한 아침을 감정의 용광로로 만든 원인이었다. 때로 다른 사람의 사생활에 지나치게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은 무엇인가 배달되어 오면 거기에 온갖 촉각을 곤두세우고, 가끔은 어이없게도 뭐 그런거 사는 걸 보니 살림이 피나보네, 따위의 해서는 안 될 말을 던지기도 한다. 그리고 나는 거기에 질렸으므로 이번만은 그냥 집으로 배달시킨 뒤, 주말에 오면 내가 받고 아니면 영업소에 들러 직접 가져오기로 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는 토요일에 물건 하나가 어디까지 왔나 확인도 해보지 않고 나가서 영화를 보았고, 갔다 와보니 배달원이 이미 떠나버렸던 것이다. 뭐 아주 당장 써야만 하는 물건은 아니었으므로 일단 어딘가에 쳐박혀 있는지도 모르는 소비자 상담센터로 전화를 걸어 다음 문을 여는 날, 그러니까 화요일에 들러 직접 가져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만약을 대비해 엉업소의 전화번호를 인터넷에서 찾아 두 번이나 전화를 걸어 확인을 하고 배달원이 집에 놓고 간 딱지의 번호마저 알려주었다.
그러나 내가 영업소에 도착했을때 배달원은 내 물건을 싣고 배달을 나가버렸다고 했다. 나는 영어로도 흥분 안 하고 화를 적절히 낼 수 있나 스스로를 시험해 볼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마치 오랫동안 외워왔던 대사를 읊듯 항의의 의사를 표현하며 매니저를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무슨 회사라고 믿을 수도 없을만큼 허름하게 옷을 입은 사람들 가운데 그나마 똘똘해 보이는 젊은 남자가 나와서 무조건 자기들 잘못이라고 말하며 사과하는데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원래 화라는 것도 상대방이 미안한 구석을 덜 보일때 그에 반비례해서 더 미친 듯이 나는 법… 다 지들 잘못이라는데 뭐 할 말이 있겠나. 그리하여 화내는 연습을 바로 접고, 나는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고, 매니저라는 친구는 배달원을 다시 불러들이고 있다고 대답했는데, 그 막히는 길을 뚫고 거기까지 온 사람이 난데 그 자리에 앉아서 배달원이 오는 걸 기다리는 건 미친 짓… 왜나면 벌써 시간이 아홉시를 넘어가고 있었으니까. 뭐 대체 페덱스라는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내가 사는 동네는 본사가 아닌 하청업체 소유의 지입트럭이 배달을 맡는 듯, 그 담당 하청업자가 전화를 걸어 자기가 직접 물건을, 그것도 점심 시간 전에 가져다 준다고 했고 나는 회사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하청업자가 말하기를 네 살짜리 아이와 같이 온다고 해서, 여기까지 오게 하는 게 조금은 미안한 마음에 같이 오는 아이에게 주려고 어제 어딘가에서 받은 지라델리 초콜렛을 챙겨놓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점심시간이 되도록 그에게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고, 전화도 받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한참이나 지나서 다시 영업소로 전화를 하니 아이를 데리고 있는 사람은 배달을 못 하는 회사 규정이 있어서 다른 회사 직원이 대신 가져다 주러 지금 막 출발하려는 참이라고… 뭐가 이렇게 어렵냐, 내 돈 주고 산 물건, 세 번이나 전화를 해서 직접 받으러 간다고 했는데도 못 받게. 하여간 문제의 물건은 무사히 도착했으나, 이렇게 멍청한 일처리로 택배나 우편물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라는 걸 생각해보면 정말 이 나라의 수준이라는 것도 한심하기 짝이 없다. 모레는 UPS로 물건을 받아야 되는데, 과연 UPS의 수준은 어떨지 기대가 된다.
이미 지각했지만, 그래도 더 지각하지는 않으리, 라는 조급한 마음으로 달려간 회사에서는 역시나 아무런 일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대체 어떤 생각으로 회사를 다니는지 몰라도, 나는 직장인으로써 바쁘지 않으면 괴로움을 느끼는 사람이다. 공짜로 돈을 받아 먹는 건 괴로운 일이니까… 적절한 대가를 받는 것도 어렵지만, 공짜로 받아 쳐먹는 건 더 괴롭다. 누군가는 야금야금 잘 먹을지 몰라도, 나는 삼키기가 괴롭다. 아니, 사실은 나도 그렇게 마음 편하게 야금야금 잘 받아 먹는 사람으로 변할까봐 그게 괴로운 것이다. 회사는 놀러 다니는 곳이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입사하기 전부터 알았던 홍보담당 여 부사장 C가 목요일부로 은퇴한다고 해서 반 값에 팔아 몇 병 사 재두었던, 이름을 읊어대기 귀찮은 이탈리아 포도주를 한 병 포장해 사무실로 찾아갔다. 돈도 좀 있어 보이는 사람이고 포도주도 마신다던데, 나중에 내가 사온게 뭔지 알면 뭐라고 그럴까, 라는 기분도 잠깐 들었다. 물론 이건 싼 녀석은 아니었지만… 그래서 늘 포도주를 선물로 사면 사람들이 잘 모를 것 같은 후미진 동네의 걸로만 사게 되는 것이다. 다들 아는 캘리포니아, 프랑스 이런 것들은 금방 비교가 되고 가격도 알게 될 확률이 높으니까.
하여간 은퇴라… 카드엔 좋은 말만 잔뜩 썼지만, 처음 얼마간은 조금 힘들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계속해서 들었다. 나처럼 혼자 백년을 살아도 그럭저럭 살 것 같은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C 부사장 같은 경우는 은퇴한 자신을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걸릴 것 같아 보였다. 아니, 사실 뭘 하느냐, 어떻게 시간을 보내느냐의 문제보다 자신이 ‘은퇴’ 라는 것을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냥 그런 관점에서 생각을 했다. 같이 일은 많이 해보지 않았지만, C는 그래도 몇 십년 일한 잘 나가는(=피도 눈물도 없이 쌩한, 물론 모든 잘 나가는 직장 여성이 다 그렇다는 건 아니다…) 직장 여성보다는 수더분한 가정주부(=아줌마)의 분위기를 풍겨서 마음에 들어했었다. 어쨌든 카드에 쓴 것 보다 더 좋은 말들을 입에 침도 안 바른채 늘어 놓고는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와 무료한 오후를 보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잠시 가게에 들러 Rhone산 포도주를 한 병 샀다. 어느 잡지에선가 읽고 생각해보니 한 번도 마신 적이 없었다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기쁘면 기쁜 기분으로 한 병, 또 우울하면 우울한 기분으로 한 병 사다 놓았다가 마시면 때로는 좀 시간이 지난 뒤에라도 그 기분이 전해질때가 있다. 오늘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알고 보면 그렇게 큰 상관도 없는 아줌마가 은퇴한다는 얘기에 삶의 내리막길을 걷는 기분이란 대체 어떤 걸까, 라는 생각을 했으니 우울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 by bluexmas | 2008/05/07 12:44 | Life | 트랙백 | 덧글(5)


(페덱스 포함, 내 돈내고 내가 받으러 가야하는 시스템에 대한 분노는 100% 공감해요. -_-^^^)


자기들 마음대로 물건 왔다갔다 보내고, 중간 물류창고로 가보라고 (상담원)해서 가면, 다시 배송시켰다느니,몇번 오라고 할때까지 안와가지고 다시 맨 처음 보낸 사람한테 재 발송중이라느니;; (사실은 자기들 잘못이면서!)
주위 아는 사람이 전해준 이야기듣고; 그저- 어안이 벙벙…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