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여야만 하는 것들

독채를 사서 살기 시작한 이후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만, 단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다면 손바닥만한 정원이나마 신경써서 가꿔줘야 된다는 사실… 잡초가 무성해진다거나 잔디가 너무 길게 자라면 단지 조합으로부터 경고장을 받게 된다. 솔직히 내가 그런 것까지 할 시간이 어디 있겠나… 늘 경고장을 받고 나서는 티만 조금 날 정도의 행동을 취했고, 그나마도 작년 늦여름 이후 가물어서 물을 쓸 수 없게 되고서는 얼씨구나 좋다고 버려두었었다.

그리고 새 봄이 돌아오자 잔디보다 먼저 돌아오는 강남갔던 잡초들… 어느새 너무 무성하게 자라서 뽑기에도 너무 벅차고 내 수준에서 뿌릴 수 있는 약을 줘도 죽지 않자, 나는 눈물을 머금고 최후의 수단인 관리업체를 정원지옥으로부터 소환했다. 사실 6주마다 한 번 정도 내는 관리비가 비싸서 작년 내내 업체를 쓸 생각을 안 했던게 아니다. 불러봐야 지독한 농약을 써서 잡초를 죽이려고 들텐데 그게 썩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까지 농약을 써서 아름다운 것처럼 보이게 가꾸는게 별로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고나 할까? 그러나 경고장을 더 받다가는 쫓겨날 것 같아서 전화를 걸어 잡초를 처리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어제 저녁, 집에 차를 대자마자 나는 그들이 왔다 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앞마당이 불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체 얼마나 강력한 제초제를 쓴 것인지, 눈이 따가워서 잔디 근처에 가까이 서 있을 수도 없었다. 얼른 집에 들어와 2층에 올라가니 약 기운이 거기까지 올라오는지 눈이 계속해서 따가운지라, 더웠음에도 창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생각하기를, 이 손바닥만한 잔디밭에도 이정도의 제초제를 뿌리는데, 옛날 베트남 밀림에 뿌려댔다는 에이전트 오렌지는 대체… 후유증이 없는게 이상하겠지.

결국 내가 예상했던 것처럼 아주 강력한 제초제를 썼음을 알아차리고 나서, 오늘은 하루 종일 마음이 불편했다. 누구 좋으라고 이렇게까지 해야되는 것일까? 잡초가 보기 안 좋으니까 죽여야만 하는 것들이라고 여기는 것 쯤이야 그렇다고 해도, 그걸 위해 사람도 잡을 것 같은 약을 뿌려놓고 잔디가 파랗게 자란다고 좋아한다면 이 삶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뒤바뀌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겉만 멀쩡해보이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고나 할까…

 by bluexmas | 2008/05/09 11:02 | Life | 트랙백 | 덧글(5)

 Commented by 보리 at 2008/05/09 11:07 

동네 산책을 하다가 초록색으로 잘 정돈된 잔디를 보면 저도 그런생각을 해요, 얼마나 약을 뿌려댔을까… 옆집 마당엔 노란 민들레가 한창인데 그 옆집엔 초록색 잔디 뿐, 민들레는 없다는건, 민들레 약을 뿌렸다는 이야기겠죠. 잡초를 잔디처럼 자라게 하면 안될까요? 안되니까 안하는 거겠죠? 아님 되는데도 안하는 걸까요?

 Commented by zizi at 2008/05/09 11:38 

어휴ㅡ 그렇군요.. 저희집 앞마당에도 지금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어요.

약을 줄 생각은 하지도 않았었지만 사실 좀 귀찮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잡초뽑기를 더욱 부지런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어쩔 수 없다거나 보기 좋아야 한다는 허울 아래 멍드는 많은 것들이 있는데 생각도 않고 살아가고 있네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08/05/10 23:14 

보리님: 그럼 아무래도 집값 떨어진다고 걱정하는 사람이 많아지겠죠. 미친듯이 정원 가꾸는 이유 가운데 가장 큰 게 아무래도 집값인듯…

zizi님: 그래도 저처럼 어떤 조합 같은데 속해있는 집이 아니라면 괜찮으니까 잡초들한테도 조금 여유를 주세요^^ 여기는 위에서 미친듯이 관리하거든요. 우리나라 골프장 잔디랑 비슷한거죠 뭐…

 Commented by blackout at 2008/05/12 21:35 

저는 진짜 손바닥만한 앞 마당이 있는데, 진짜 신경 손톱만큼도 안쓰고 놔덨더니…거대민들레가!!! 전 무슨 유전자 조작 민들레인줄 알았어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08/05/13 12:13 

그거 유전자 조작 맞아요! 유전자 조작 쇠고기 먹고 자란거라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