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주말

날씨 덕분이었다. 지난 수요일에만 해도 35도를 넘겼었는데, 주말을 앞두고 갑자기 습기가 가시고 바람이 제법 서늘하게 불었다. 한 달 정도 있으면 다가올 가을의 예고편과 같은 날씨였다. 이 동네는 여름이 지독하게 기니까 가을도 사람들이 자기를 아예 잊어버릴까봐 걱정을 했는지, 곧 찾아 올거니까 조금만 참고 더 기다려줬으면 좋겠다는 애원과도 같은 서늘한 날씨. 아예 가을따위가 없는 날씨라면 사람들이 포기하고 살겠지만, 또 그렇지는 않아서 사람들은 기대를 하다가 또 여름이 너무 길어지면 땀을 너무 많이 흘리면서 기억도 같이 흘려보내서 잊고, 그걸 아는 가을은 매년 이맘때쯤이면 조급증에 안달을 하고… 사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잊고 살지는 않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래도 그걸 얘기해주면 너무 안심을 할까봐서 그렇다고 얘기해주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나 할까.

금, 토요일에는 뭐랄까 오랫동안 아닌 척-의 벽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 찾아왔었다. 어제 쓴 글에 같이 올렸던 Sigur Ros의 노래(Hoppípolla)는 Heima에서 가장 좋은 것이었는데, 제목을 제대로 몰라서 어떤 앨범에 들어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차피 이번 달이 가기 전에 전작을 사기로 마음 먹었으니 언젠가는 찾게 되겠지, 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금요일 전까지 샀던 앨범들에는 없었다. 결국 금요일 저녁에 Borders에 가서 집어들었던 2005년 작 Takk에서 찾았는데, 차에서 CD를 돌리니 이 노래 뿐만이 아니라 DVD 전체를 여는 곡인 Takk/Glósóli/Hoppípolla이 한꺼번에 파도처럼 밀려왔고, 그 파도에 오랫동안 아닌 척-의 벽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도저히 멀쩡한 척 하고 싶지 않을때에는 혼자 있는 상황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다. 게다가 주말이라면… 어쨌든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는 안전한 상황에서 불행이 불행답다는 걸 인정하고 나니 행복감이 밀려왔다. 나에게는 분명히 불행한 구석이 있다. 그 존재를 완전히 부정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그 모든 것을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해왔던 건 분명히 일종의 소극적인 부정이었다. 나 혼자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 꽤 많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마 불행이 불행답다는 걸 인정하는 뭐 그런 절차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거창하게도 했다. 그리고는 일요일 낮에 10km 달리기를 하고 나서 다시 사람으로 돌아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서점에는 새로 나온 잡지가 그득했고 언제나처럼 무엇엔가 쫓기는 마음으로 허겁지겁 이것저것 읽어댔다. 낮은 아직도 꽤나 길었는데, 그 낮의 꼬리가 드리우는 기나긴 내 그림자만큼 행복을 느낄 순간은 충분히 있었다. 그렇지만 내 행복은 구형 휴대전화기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전지가 거의 다 닳았는데 충전기는 벌써 오래오래전에 잊어버렸고 너무 구형이라 다시 구할 방법도 없다고 했다. 그리하여 유지는 간신히 하고 있지만 어디에선가 전화가 와서 통화가 길어지면 곧 죽을 전화기- 웃기는 건 그렇게 오랫동안 전화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정작 그 기다리던 전화가 오면 이 전화기 또는 행복이 통째로 죽어버릴까봐 걱정한다는 사실. 종양과 같은 삶의 아이러니가 결국은 행복에까지 전이되었으니 원래 시한부인 이 삶의 종말이 앞당겨지는 것은 아닐까, 나 전전긍긍해야만 할 것 같다.

 by bluexmas | 2008/08/11 12:47 | Life | 트랙백 | 덧글(6)

 Commented by Eiren at 2008/08/11 13:00 

이 곳도 오늘 선선해서 정말 좋았어요^^ 낮 최고기온이 22도였다는데, 그렇게 서늘했던 것 같진 않지만요. 사진이 편안한 게 행복한 주말 보내셨다는 말씀이 더 가깝게 느껴집니다.

 Commented at 2008/08/11 13:0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08/08/12 11:57 

Eiren님: 사실 해가 지기 전에 사진을 찍으려고 그랬는데 서점 갔다가 돌아와보니 해가 벌써 졌더라구요. 그래서 어쩔 수 없었죠. 그래도 미시간쪽은 많이 안 덥지 않나요?

비공개님: 행복의 짝이 불행일테니 행복하려면 불행도 있어야 되고, 뭐 그렇지 않을까요?

…그러나 아슬아슬함을 느끼는 것만은 사실이에요, 사실은…

 Commented by 샤인 at 2008/08/13 09:26 

아틀란타가 확실히 더울땐 더덥고 시원할땐 더 시원한거같아요.

잘 지내셨어요? =) 전에 아틀란타가서 연락도 못드렸네요. 그때 아틀란타가서 정말 여기로 이사오고싶다- 는 생각만 가득안고 왔다는. ㅡㅜ

 Commented by bluexmas at 2008/08/13 14:35 

와! 정말 오랫만이네요. 잘 지내셨죠? 다음에 오실때는 연락주세요. 월남 쌀국수라도 같이 드시게…

 Commented by 샤인 at 2008/08/15 13:42

아틀란타에 월남쌀국수 잘하는데 있어요?

여긴 Asian market에 딱 하나있었는데 거의 맨날 사먹었구만..

DHEC에서 C받고 문닫았따눈;; 두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