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는 테이블의 죽음

피곤하지만 보람된 하루였다. 야근했지만 그렇게 오래 시간을 끌어야 되는 일은 아니었고, 일에도 실수가 전혀 없었다. 단골로 가는 술가게가 문을 닫기 전에 일을 끝냈음으로, 그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늘 추천을 받는 직원의 도움을 얻어 적포도주 두 병을 사가지고 들어왔다. 똑같은 포도주였다. 주말에 저녁초대자리를 만들었는데, 매운 중국식 쇠고기 볶음을 만들 생각으로 그에 맞는 포도주 두 병을 추천해달라고 했다. 그의 부탁에 직원은 생각보다 조금은 비싼 진판델을 권해주었다. 왜 두 병일까? 주말까지는 시간이 좀 있었으므로 그는 주말에 손님 접대를 위해 만들 음식을 똑같이 만들어 포도주와 함께 먹어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예행연습인 것이다. 평소엔 그렇게까지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그였지만, 이번엔 좀 노력이 필요했다. 집에 사람을 불러서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니까. 사람’들’을 위해서는 꽤나 많이 이런 짓거리를 해 왔던 그였지만, 그냥 ‘사람’을 위해서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잘 하고 싶은 마음이 넘쳐났다. 그래서 연습이 필요했다.

하루 종일 스트레스를 받으며 일했으므로, 일단 좀 느슨해지고 싶은 마음에 사온 포도주 한 병을 따서 조금씩 마시기 시작했다. 정석대로라면 열릴때까지 기다려야 하지만, 그는 원래 정석 같은 건 따르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별 상관이 없었다. 일단 마시기 시작하면 내가 열리든 포도주가 열리든 둘 가운데 하나는 열린다는게 그의 지론이었다. 하여간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올림픽 중계를 보면서 포도주를 홀짝거리는데, 오늘따라 맛이 좀 이상했다. 짠 맛이 너무 많이 도는 느낌이었다. 그는 적어도 매주 한 병씩은 포도주를 마셔주는 사람이었지만 주로 좋다/나쁘다로만 맛을 기억했지 부케며 뭐며 이딴 기억하기 버거운 전문적인 용어로 와인을 기억에 담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짠 맛이라니, 이건 기억을 더듬을 필요도 없는 상황이었다.

너구나.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까만색 탁자였다. 소파와 42인치 DLP 텔레비젼 사이에 놓인, 모더니즘을 바탕으로 단순하게 디자인된 탁자. 가구라고는 쓰지도 않는 서재에 있는 책상과 책장이 전부인 그에게 유일한 사치로 허용된 Giulio Lazzotti의 탁자는 그가 처음 미국에 왔을때 Design Within Reach-사람들 사이에서는 비아냥거림과 함께 Design Out of Reach로 기억되는-에서 산 녀석이었다. 딱 하나만은 뭔가 디자인이 가미된 걸 가지고 싶다니까, 라는게 그의 순진한 변명이었고 그의 취향은 미니멀리즘을 만족시켜주는 탁자를 찾기 위해 개강 한 달전에 미국에 들어와서는 개강 후 한 달이 지나기까지도 저녁시간을 내내 인터넷 검색으로 보냈었다. 그래서 찾은 녀석이 바로 이 탁자였다. 그냥 검정색에 너무나도 단순한 탁자, 디자이너의 이름이 깃들여 있지 않았다면 누구라도 디자인 할 수 있는 단순함의 극치.

너, 기억하고 있구나. 미국에 온지 만으로 7년이 지난 그에게 그 처음부터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물건은 이 탁자가 유일했다. 어느 순간, 그는 모든 것을 쓸어다 버렸으니까. 기억의 매개체라면 그 어느 것도 필요없어. 옷을 기증했고, 속옷을 불태웠으며 머리도 한 반 년 동안은 삭발했었다. 아직도 그 손이 내 머리를 만지는 기분이라니까. 고등학교 시절, 삭발이 유행처럼 반반마다 휩쓸고 지나던 시절에도 버텼던 그가 서른 하나에 삭발을 했던 동기는 그저 아무 것도 아닌 버리고 싶은 기억일 뿐이었다. 그렇게 노력해서 많은 기억들을 버렸는데, 언제나 말이 없을거라고 생각했던 탁자가 감히 그 모든 걸 기억하고 있다니, 그는 곧 분노에 휩싸였다.

너, 드디어 말을 하고 싶은 때가 된거구나. 워낙 말이 없게 생긴 녀석이라, 지난 서너해동안의 그 지옥과도 같았던 개인적인 분쟁을 기억하고 있을거라고는 생각조차 해 봤던 적이 없었는데… 아니, 기억하고 있다고 해도 감히 말하고 싶을거라고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와인에 짠 맛이 돌기 시작한다는 건 이 끝없이 과묵할 것이라고 믿었던 탁자의 침묵과 인내에 만료기간이 찾아온다는 징표였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와 같은 개인사를 겪은 사람들로부터 들은 얘기였다.

너, 그래서 토요일 저녁에 다 털어놓을 계획이었구나, 내가 사람을 불러서 앉혀놓고 마지막 저녁 준비를 할 그 순간에. 오랫동안 억눌러만 왔던 그의 집요함과 잔혹함이 너무나도 오랫만에 의식의 동면에서 깨어나기 시작하는 것을 그는 느꼈다.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다른 때라면 모르겠지만, 이번엔 안 되거든. 이번에 내가 저녁을 대접할 사람은 굉장히 중요한 사람인데 네가 망치려 들다니, 정말 믿을 수 없구나.

마음을 굳히는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직도 고속도로를 시속 130 킬로미터로 달려 후끈한 차의 열기를 받아 후덥지근한 차고로 통하는 쪽문을 열고, 그는 소방안전을 위해 의무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하는 도끼를 집어들었다. 미안하지만, 이쯤에서 죽어줘야만 할 것 같아. 나도 너를 무척이나 아끼긴 하지만, 몇 년만에 잡은 이 기회를 네가 망치도록 놓아둘 수는 없는 노릇이거든. 그가 사형선고를 내리는 와중에도 그는 까만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과묵해서일까, 아니면 이제는 두려움 때문일까. 미안하지만 피는 흘릴 수 없어. 까맣든 빨갛든, 카펫에 밴 피를 없애는데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니까. 대신 비명은 질러도 좋아, 어차피 음악을 크게 틀거거든. 어차피 마지막이니까 노래는 원하는 걸로 틀어줄께. 나,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너그러운 사람이거든.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이젠 어쩔 수 없구나. 나도 이젠 사람답게 살고 싶거든. 죽도록 혼자 만들어서 먹기도 지쳤고. 그러니 나를 원망하지는 말아줘.

그러나 침묵은 공기와도 같이 존재감을 주지 않은채로 그 존재를 지속시키고만 있었다.

 by bluexmas | 2008/08/21 13:30 |  | 트랙백 | 덧글(6)

 Commented at 2008/08/21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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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ed at 2008/08/22 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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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ed at 2008/08/22 0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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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ed at 2008/08/22 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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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ed at 2008/08/22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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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ed by bluexmas at 2008/08/22 13:05 

비공개 1님: 풀이 죽으셨다니 제가 다 마음이 아프네요. 비공개님처럼 오시는 분들께 재미를 드리려고 쓰는 글들인데 풀이 죽으셨다니… 어떻게 하면 좋을런지… 저도 고민되네요.

비공개 2, 3, 5님: 탁자를 빼놓고는 모든게 다 디자인의 냄새라고는 가문 여름날 오후에 드문드문 내리는 빗방울만큼도 없는게 제가 사는 집의 분위기라서요. 물론 이 탁자도 허구에서만 제 집에 자리잡고 있지만…

비공새 4님: 잘 지내셨어요? 버리게 만든 그 무엇은 얄팍한 미래에의 희망이겠죠. 보이지도 잡을수도 없는, 그러나 있다고 믿게 만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