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일
응? 밤일=야근이지 뭐…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도록 운명지어진 30대에게 야근만이 살길이지 뭐 별거 있남.
뭐 존재가치도 미미하게 느껴지는 오후, 집에 가봐야 쓸데없는 생각만 할 것 같아서 그래, 오늘은 야근 이라고 마음속으로 복창하고 대강 저녁까지 주워먹고 잘 되지도 않는 일을 꾸역꾸역하는데 일주일에 한통 이상은 잘 오지 않는다는 전화가 울린다. 친구 M(대학원 동창)이었다. 간만에 마누라(역시 대학원 동창)가 친구들(알고보니 역시 대학원 동창)이랑 저녁을 먹으니까 간만에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그러고보니 마지막에 같이 밥 먹은게 7월이었던가? 학교 체육관에서 오다가다 마주치고 얘기도 하고 그러기는 하지만 서로 바쁘다보니 시간내서 어울리기가 힘들다. 게다가 내가 요즘 기름값이 비싸다는 핑게로 주말에 같이 미식축구 보자는 제의를 은근슬쩍 물리고 나서는 더더욱… 사실은 주말에 어디 나가기도 귀찮고 영어하기는 더더욱 귀찮아서 그러는건데. 주말이면 무조건 shut down, 영어고 뭐고 귀찮다, 혼자 있게 해줘 서점가서 책이나 보게… 뭐 대강 이런 식이다. 이 정도면 은둔자라고 누군가 손가락질해도 할 말이 없지 뭐. 어쨌든, 친구가 간만에 불렀는데 일이 다 뭐냐…다시 회사에 돌아오는 한이 있어도 여기에서 접자, 라는 생각으로 자리를 뜬다. 그러나 팀 사람들 어느 누구도 사실은 자리를 뜨지 않았고 다들 저녁도 벌써 주문했다. 그러니까 오늘 여기에서 다 같이 죽자는 분위기로 야근 마라톤이 벌어지는 거다. 아무도 자리를 뜨지 않는다, 누구 하나가 게거품을 바락바락 물고 쓰러질때까지… 그러나 나는 일단 자리를 뜬다. 차가 주차장을 막 벗어날때쯤에야 도면 그리는 것도 아닌데 일을 가져와서 집에서 할 것을… 하는 생각이 든다. 알게 뭐냐, 그냥 무시하고 학교로 향한다. 친구는 먼저 운동을 하고 있었고 나도 일단 부지런히 달린다. 지금 처한 상황을 생각해서는 한 세 시간 쯤은 운동을 해야할 것도 같은데 친구가 운동을 마쳤으므로 나도 달리기 20분 만에 운동을 접고 같이 체육관을 나선다. 학교 근처 식당/주점에서 자리를 잡고 이어지는 건 그냥 일상적인 대화… 친구는 내 주변 사람들 가운데 블로깅을 한다고 말한 유일한 사람인데, 그걸 얘기해주고 나서는 만날때마다 블로그에 대해서 물어본다. 현재는 안타깝게도 한때 야심차게 기획한 영어블로그가 완전 동면상태라서 친구에게 보여줄게 없다. 해서 미안한 마음에 아무에게도 얘기한 적 없는 이런저런 계획을 말해줬다. 그리고 저녁을 또 먹었다. 그러고보니 별로 먹은게 없어서 배가 고팠다. 친구는 농담으로 요즘 기름값이 많이 내렸으니 다음엔 자기 집에 와서 미식축구를 같이 보자고 얘기한다. 그래. 담엔 내가 먹을거 만들어 갈께 같이 보자.. 라고 대답하고는 닭날개를 깜풍기 양념으로 만들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한 시간인가를 좋게 말하면 일상생활에 대한 대화, 그리고 간단히 말하면 수다, 를 떨고 식당/주점을 나선다. Hey man, I am so happy to see you tonight, finally…. I’ve been having mood swings… don’t even want to call my parents when I get through this…as they will get worried even though I don’t say anything… M은 차를 다시 학교로 몰고와 나를 내려놓고 간다. 그리고 나는 회사로 향한다. 쓰레기통 같은 책상에서 일거리를 집어들고 자리를 다시 뜬다. 역시나 자리를 뜬 사람이 거의 없다. 그러나 나는 집에 간다.
사실 회사 일을 집에 가지고 와 본 적은 거의 없다. 언젠가는 그걸 철칙으로 지켰었다. 회사일은 회사에서 끝, 집에 와서는 생각도 하지 않겠다…라고. 그러나 그게 3년차를 넘어서고부터는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게다가 나에게는 혼자서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생각을 하는 시간이 굉장히 중요한게, 가끔 3차원 시각화가 남들보다 원활하게 안 된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원인은 아마 절반이 나에게 그런 부분이 좀 부족해서이고, 나머지 절반은 내가 사람들 많은 곳에서 아주 집중해서 하는 일을 잘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사실은 그게 나의 가장 큰 문제다. 나는 여러가지 이유로 건축을 업으로 선택했지만 이건 나에게 언제나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고, 그렇게 어려운 일을 할때 나는 절대 혼자 있어야만 한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집중이 잘 안 되니까. 그래서 사실 나는 학교에 다닐때에도 스튜디오에서 시간을 보낸 적이 거의 없다. 아직도 나는 잘 모른다. 그렇게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내가 하는 일이 나의 최선이 아닌지, 아니면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데 단지 그게 나 혼자 있을때 빚어낸 결과물이 아니라는 이유로 내가 믿음을 주지 않는 건지… Why so serious? 그냥 대강 챙겨서는 집에 와서 펼쳐놓고 그려본다. 지금 일하고 있는게 디자인이냐고? 절대 아니다… 주차장 일을 한게 벌써 몇 달이더라? 때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디자인과 내가 하는 디자인이라는 건 정말 지구에서 달만큼 멀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디자인이라는게 형태를 만드는 것이라면, 내가 생각하는 디자인이라는 것은 Coordination에 가깝다. 언젠가 이것에 대해서는 글을 쓰면 좋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어쨌든 도면이랑 이것저것을 펼쳐놓고 선을 그린다. 내가 왜 그다지 재능도 없는데 이 바닥에 몸을 던지기로 마음을 먹었을까, 생각을 해 보면 무엇보다 뭔가 그리는 직업을 가지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이 직업에는 뭔가를 만들 수 있는 능력도 필요하고 그건 어느 정도 메꿀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리는 능력은 완전 꽝이었기 때문에 이 바닥에 몸을 던지면 그리는 실력이 좀 늘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냥 뭔가 그릴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15년이 지난 다음에 돌아보면 나에게 벌어진 경우는 당연히 후자… 아름다워 보이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선을 몇 개 그어 도로를 그리고 주차장을 그려 현재 상황에서 필요한 해법을 찾는다. 나에겐 정말 이런 시간이 너무나도 필요하다. 회사에 그냥 앉아서 급하게 주어지는 일만 하다보면 거기에 너무 빠져서 내가 왜 이 일을 하는지 그 큰 그림을 볼 수가 없게 되는 경우가 많고, 그러다 보면 작은 일들에서 놓치는게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싫어도 가끔은 내 시간을 들여 도면을 들여다보고 나름 소화하는 시간을 가져야 되는데, 워낙 게으른 사람이다보니… 이번 주말에도 정말 큰 맘 먹고 시간 들여 도면을 보겠다고 출력까지 해 왔는데, 토요일엔 내내 자빠져 자고, 일요일엔 거의 열 두 시간동안 청소를 하느라 결국 도면은 들여다보지 못했다… 그랬다면 지금이 좋은 기회니까 도면을 좀 들여다본다. 그렇게 한 시간 조금 넘게 시간을 보내고 아버지의 메일에 답을 한다. 아버지는 일주일에 한 두번 메일을 보내시는데, 사실 거의 답은 하지 않는다. 분명히 새벽에 깨어서 메일을 보내셨을거다. 1년 반, 2년에 한 번 집엘 가면 아버지는 여전히 새벽에 일어나서 뭔가를 하신다. 그런 시간에 분명 메일도 쓰실거다. 일하다가 퇴근 시간 가까워서 메일을 뒤져보면 꼭 아버지 메일이 있으니까. 사랑하는 우리 아들 ##에게, 라고 아버지는 메일에 쓰셨다. 정말 웃기는게, 아들만 둘 있는 우리 가족은 단 한 번도 드러내놓고 사랑, 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아본 기억이 없다는거다. 그건 아무래도 사랑의 존재를 못 믿어서가 아니라 단어를 입에 담는게 너무나도 낯 간지러워서겠지… 가뜩이나 나이 들어가시는 부모님 곁을 떠나서 이런 몰골로 사는 것도 미안한데 답장 쓰는데 얼마나 걸린다고 그것도 안 하냐 싶어 불효자는 Reply 버튼을 누른다. 그러나 이 빌어먹을 윈도우 비스타는 감히 부모님으로부터 온 메일조차 block시키는 패륜아에 가까우니 내가 어찌 비스타를 사랑할 수 있으랴… 언제나 메일이 올때면 그래왔던 것처럼 Unblock을 누르고, 또 reply를 누르고 답장을 쓴다. 술도 한 잔 마셨겠다, 오랫만에 나도 사랑한다는 말을 입에 한 번 담아본다. 사랑하는 아버지, 저는 별 일 없어요. 덕분에 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결혼기념일에 맞춰 여행 잘 다녀오세요…. 내가 이 가정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나는 대체 또 어떤 종류의 삶을 살고 있었을까. 이렇게 낯 간지러운 말까지 들먹여 가며 메일이라도 쓰는 날엔 모든게 생각보다도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닌가 걱정하기 마련이다. 잠깐 스쳐가는 인연에게조차 망설임없이 썼던 사랑, 이라는 말 뭐 늘 함께 있었던 가족에게조차 못 쓰겠나… 그런 생각에서 삶의 모순이 물씬 느껴진다. 때로 가까이 있는 것들을 소중하게 생각하기란 지상 최대의 과업처럼 느껴지는 가운데 새벽 두 시라는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다가온다, 마치 하루가 열 하고 여덟시간에 불과한 것처럼.
# by bluexmas | 2008/10/23 15:11 | Life | 트랙백 | 덧글(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