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일담: 반쪽 마라톤
내가 무슨 ‘이글루스 100대 파워 블로거’ 도 아니고 해서, ‘근황’ 뭐 이런 제목의 글은 닫았을 때부터 쓸 생각을 하지 않았다(그렇지만 반갑다고 답글 달아주신 분들께는 진심으로 감사를^^). 하지만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으니 추수감사절 아침에 뛰었던 반쪽 마라톤 얘기라도…
결론부터 미리 말하자면, 딱 생각했던 기록에 굉장히 가깝게 완주를 했으니 만족스럽다고 생각할만한 첫 번째 진정한 장거리 달리기였지만 그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좀 많았다. 첫 번째 우여곡절은 진짜 우여곡절이라기 보다는 바보짓이라고 하는게 더 적합할 것 같은데, 블로그 닫기 전에 썼던 것처럼 진짜 달리기를 며칠 앞두고 풀 코스를 뛴 것. 몰랐는데 이 정도의 장거리를 뛰고 나면 뛴 그 날에도 힘들지만 그 여파가 적어도 사나흘은 간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렇게 해 봤던 적이 없으니 알 수가 있나… 달리 말하자면 일요일에 그렇게 달리기를 20킬로미터 넘게 하고, 계속 힘들다고 느껴질만한 상황에서 다시 한 번 같은 거리를 달린다는 건데 지난 몇 개월 동안 나름 훈련이랍시고 열심히 뛰기는 했지만 그게 또 초절정으로 체계적인 것은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여름 휴가 다녀오고 나서 한참동안 몸상태에 만족스럽지 않았고 그 상태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으니 그렇게 며칠 전에 무리를 해서 뛰는 상황은 절대 아니던 셈… 그것이 첫 번째 바보짓이었다.
두 번째는 바보짓이라기보다는 몸이 보여준 반항… 진짜 달리기 열흘 전인가부터 왼쪽 허벅지에 그럭저럭 견딜만한 통증이 찾아오고 있었다. 평소에는 멀쩡하다가 5km정도를 넘기면 찾아오는 통증이었는데, 그냥 근육통이겠거니 무시하다가 이 통증이 언젠가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다가 찾아온 것 같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탈장일 가능성이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짐작을 하고는 병원에 찾아갔다. 다행스럽게도 병원에서는 탈장은 아닌 것 같다고 했고, 나는 그것만 아니라면 기어서라도 완주할 생각을 했기 때문에 마음 놓고 달렸으나 마지막 5km 정도에서 통증이 정말 심해서 거의 절룩거리면서 뛰어야만 했다. 그러나 절대 걷지 않았다.
세 번째는 아이팟 오차… 11월 초였나, 사람들이 미리 측정해놓은 10마일을 뛰면서 그 거리와 아이팟이 읽는 거리의 차이가 너무 심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반쪽 마라톤에서의 오차는 무려 10%였다. 달리 말하자면 지금까지 난 내가 달려왔다고 생각했던 거리보다 10%나 적게 달려왔던 셈…. 따라서 며칠 전에 내가 풀 코스로 뛰어서 한 시간 사십 육 분의 기록으로 끝냈다고 생각했던 21킬로미터는 사실 19 킬로미터 정도에 불과했던 셈이었다. 결국 나의 기록은 그렇게 만족할만한 것이 아니었다는 얘기.
그래서 달리기 당일 아침, 날씨는 무지하게 추웠고 사람들은 그 전날 탄수화물을 많이 먹어야 된다고 얘기를 했는데 난 배부른게 싫어서 평소처럼 전날 저녁과 그날 아침을 먹은 뒤 갈아입을 옷가지와 달리기가 끝나면 먹을 음식, 물 등등을 챙겨서는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그날의 코스는 종점 바로 다음 정거장. 지하철에서 시간을 너무 많이 보낸 탓에 출발점에 도착하니 시간이 빠듯했는데, 화장실에는 사람들이 넘쳐났고 나는 가장 처음 무리였다. 남자들은 줄을 서다가 포기하고는 아무 곳에나 서서 깔겨대는 용기있는, 그리고 남자다운 모습을 보여줬지만 나는 남자다운 것과는 서울과 부산만큼 먼 사람이었으므로 얌전히 차례를 기다려서 화장실을 쓰고는 출발점으로 냅다 달렸는데, 내 무리는 벌써 저만큼 앞질러 나가고 있었다.
코스는… 정말 더럽게 지루했다. 그러니까 거의 절반이 7월 4일에 뛰었던 10km와 겹쳐서 주체할 수 없을만큼 심심했다. 게다가 중간중간에 에너지를 보충하려고 먹는 젤리를 액체보다는 고체에 가까운, 중간에 공짜로 나눠주는 젤리빈(그 사람들이 먹는 젤리빈과 똑같은데 지구력을 요하는 운동에 필요한 영양소를 갖췄다고 주장하는, 그러나 사람들은 그냥 젤리빈과 똑같은 설탕과 옥수수 시럽 덩어리라고 믿는-)으로 택한게 결정적인 실수였다. 얘들이 추운 날씨에 딱딱하게 굳어서 달리면서 씹는데, 달리기보다 씹는게 더 힘들었으니까(완주를 하고 다시 지하철역까지 걸어서 돌아오는데 지나가던 남자가 ‘Shit, it takes a mile to chew’ 라고 투덜거리는 걸 들었다. 난 하나 씹는데 한 2마일 정도 걸렸는데, 그 남자는 나처럼 임플랜트가 없었던 모양…). 게다가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마지막 5킬로미터 정도는 정말 다리가 너무 아파서 달리는게 버거웠다. 그러나 별 수 있나, 일단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 생각보다 기나긴 코스는 1996년 올림픽 주경기장으로 쓰던 Turner Field에서 막을 내렸고, 나는 그 마지막 1km 정도를 나의 전통대로 전력질주해서 마쳤다. 사람들과 함께 달려서 생각보다 빠른 페이스였으나 아이팟의 오차로 더 긴 거리를 소화해야만 했으므로 기록은 한 시간 오십 칠 분대, 가까스로 두 시간 안 쪽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기록측정을 위한 센서를 신발에 달고 달리므로 결승선에 사람이 들어올 때마다 진행자가 스크린에 올라오는 이름을 보고서는 ‘John Smith!’, ‘Katherine Heigl!’ 과 같은 식으로 이름을 읊어주는데, 내 이름은… 그냥 넘어가더라고.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도 아닌데 지레 겁 먹은 듯.
어쨌든 두 다리 다 붙어있는채로 결승점을 통과해서 초등학교때 독후감 써서 상 받으면 딸려오는 메달 같이 싸구려 느낌이 나는 기념 메달을 받고, 나눠주는 간식거리 몇 가지를 챙겨 가방에 담아서는 다시 1.5킬로미터 정도를 절뚝거리며 걸어서 지하철역까지, 달려왔던 길을 되짚어 와서는 집에 돌아왔다. 저녁 초대를 받았으나 걷기도 힘들었던 관계로 전화를 해서 취소하고는 집에서 칠면조 대신 영계를 구워 포도주를 빨대로 빨아 마시며 완주를 자축했다. 사실은 내년 봄, 생일날 열리는 반쪽 마라톤에 벌써 등록을 했는데 등록할 당시에는 한 번 반쪽짜리 뛰어봤으니 이제 2012년 런던 올림픽 국가대표 차출을 위해서라도 풀코스에 도전해야 되는 것 아닐까- 생각을 했으나 뛰어보고는 한 번 더 뛰어보기 전까지는 그런 생각일랑은 안 하기로 마음 먹었다. 오래 달리면 숨차서 더 못 달릴 것 같은데, 그게 아니라 다리가 풀려서 못 달린다고… 그래서 당분간은 예전처럼 달리기보다 근육운동을 더 중점적으로 해서 근력을 키워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이걸로 반쪽 마라톤 후일담 끝.
난 처음에 사람들이 사진을 찍어준다고 그래서, 어차피 혼자라 사진 찍어줄 사람도 없는데 잘 됐다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이제 완전 폭리 장사라서 사진을 자기들 사이트에 올려 놓고서는 한 장에 $15이하로는 안 판다고. 내려 받을 수도 있으나 그건 한 장에 $40… 마라톤 참가비도 $5~60은 하는터라 돈 없으면 마라톤 뛰기도 힘든데 사진까지? 그렇지 않아도 사보에 기사 싣고 싶다고 사진 없냐고 물어보던데, 기사를 안 내는 한이 있어도 저 돈에는 요즘 같은 상황에 사진 살 수 없다고… 그러나 사진은 가지고 싶어서 생각 끝에 미리 보기 창을 띄워서 스크린 캡처를 했다. 저 가운데에 선명하게 찍힌 워터마크… 그래서 얼굴이 안 찍히는게 얼마나 다행인지, 차라리 고맙기까지 하다. 저것도 웃기는게 뛰워놓고 한 3초쯤 있으면 창이 알아서 사라진다. 그러니까 캡춰도 하지 말라는 수작. 그러나 거기에 내가 굴할 수 없는 노릇.
이 사진은 막 달리기를 마치고 세파에 찌든 아저씨와 같은 표정. 빚이 넘쳐나서 마음 고생이 심한 표정이다.
분위기를 전환해서 뭔가 금메달이라도 딴 것 같은 표정을 지어보고자 싸구려 메달을 씹는 표정.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금메달 따면 저런 표정을 지어보려고 미리 연습중이라고.
두 사진 모두 다리 위에서 잘라서 밑에 받쳐 입은 쫄쫄이는 안 찍혔는데, 쫄쫄이를 처음 입어본 소감을 말하자면 이제서야 왜 여자들이 겨울에 치마만 입고도 생각보다 안 춥다고 말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사실 쫄쫄이가 너무 비싸서($50정도?) 그냥 수퍼마켓에서 팬티 스타킹을 두 짝 정도 사서 겹쳐 입고 뛸까 생각하다가 땀 배출이 안 될 것 같아서 눈물을 머금고 쫄쫄이를…
# by bluexmas | 2008/12/11 15:10 | Life | 트랙백 | 덧글(11)





비공개 덧글입니다.






완주 축하드려요. ^ ^


비공개 덧글입니다.


비공개 1님: 알고 보면 노트북에 21개 숨겨져 있는데 책 내면 안 될까요?-_-;;; 하루에 열 개도 쓸 수 있습니다, 누가 책 내준다면.
보리님: 감사합니다^^
turtle님: 피곤해서 사실은 뿌듯한지도 몰랐어요. 생각보다 힘들더라구요…
nippang님: 사실 알고 봤더니 제가 쌍동이였는지도? 하하… 감사합니다.
비공개 2님: 그럼 당분간 즐거운 시간 보내셨으면 좋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