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업일기(8)-행복에 대한 기대감이 빚어내는 그늘

인터넷이 안 된다. 궁리 끝에 흘러다니는 신호를 훔쳤다. 오늘의 생활은 무척이나 불규칙했다. 그냥 계속해서 자면 괜찮을텐데 또 중간에 일어나서 책상을 치우기 시작했다. 역시 규칙적인 생활을 억지로라도 지켜줄 무엇인가가 없으면 혼자 살아도 꽤나 규칙적인 삶을 산다고 생각하는 나같은 사람조차도 균형을 맞추기가 힘들어진다.

어쨌거나 계속되는 실업일기.

참! 언제나 궁금하기는 했지만, 내 블로그 링크한 사람이 몇 명인지 꼭 그렇게 대놓고 알아야 될 필요가 있나? 이글루스 어째 가면 갈 수록 너무 재수없어지는 듯한 기분이…

예의상 그렇게 해 주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새 직업 탐색을 위한 세미나를 마련했다고 했다. 전 회사에서, 돈도 내주고. 처음 얘기를 들었을 때는 이게 무슨 직업 알선 세미나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력서 쓰는 법, 인터뷰 하는 법, 뭐 그런 얘기들을 하는 세미나라고 했다. 음… 생각 끝에 가지 않기로 했다. 직업 컨설팅 회사라니, 요즘 같은 때에 장사 잘 되겠다, 라는 생각을 일단 했고, 그게 누구든지 간에 회사를 나간 사람들을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다. 동병상련…? 어쨌든, 그 시간에 다른 걸 해야지 생각을 했으나 사실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적어도 구직활동을 위한 것은.

영화를 보았다. Revolutionary Road. 진작에 보려고 했었는데 지난 주에 그 난리를 치느라 영화 볼 기분이 아니었다. 어쨌든 이 영화는꼭 봐야할 것 같아서 영화 시간 30분 전에 일어나 잠에서 덜 깬 채로 차를 몰아 극장으로 향했다.

영화의 예고편을 보았을 때, 영화의 제목이 무엇인가 의미를 담고 있지 않나 생각했었는데, 사실 그건 그냥 영화의 주인공 부부가 사는 길의 이름이었다. 그러니까 집이 그 길 위에 자리잡고 있는. 물론 한 꺼풀 벗겨보면 의미가 없다고는 생각이 들지 않지만. 어쨌든, 영화는 두 사람에 대한 설명을 하는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바로 두 사람이 탈출하고 싶어하는 현실을 보여주면서, 두 사람이 예전에 동경했던 삶이 어떤 것이었는지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니까 두 사람은 50년 전의 일상에서, 내가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현실에서 탈출하고 싶어한다. 특히나 여자가 더더욱… 이루고 싶은 것이 있었으나 교외에서 평범한 가정주부로 사는 여자는 오랜 시간 준비를 하고 또 남편에게 동기를 불어넣어 그 지긋지긋한 현실을 탈출하고자 하지만, 결국 그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게 된다. 그 뒤에 여자가 택하는 길은… 나름 예측 가능한 것이었다. 그 방법이 조금 다를 뿐이었지만.

어쨌든, 1955년이 시간적인 배경인 이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벗어나고 싶어하는 현실 또는 일상이라는게 바로 50년도 더 지난 지금 내가 나름 아무도 모르게 동경하는 것이라니, 대체 나는 무슨 생각으로 이 삶을 살았던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따위 현실에대해서 생각을 하려고 영화를 보러 갔던 것이 아니었는데, 영화를 보는 내내 그런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딱 일주일 전, 회사에서 봉투를 받아쥐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파악해보았다. 뭐 그건 그렇게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 아니었다. 두려움, 그게 내가 언제나 가져왔었던 감정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할거라는 두려움, 또 그러면 내가 이 자리에서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 또 그렇게 되면 일을 할 수 없게되고 또 일을 못하면 다시 돌아가야 되고, 그러면…

그러면 뭐? 그래, 정말 이 모든 것이 다 처음 이 곳을 오면서 계획했던 대로 풀리지 않아 다시 돌아간다고 치자, 그래서 네가 가장 두려워하는 게 뭔데? 단지 나는 두려워하고 있어, 라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고, 또 도움도 되지 않는다. 더 중요한 건 그 감정의 이유나 근원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그때 부터 나의 멱살을 쥐고 흔들면서 윽박지르는 거지, 그래서 왜 두려움을 느끼는건데? 이봐, 침 튀잖아. 좀 살살하면 안 될까?

그래, 뭐 그런거지. 돌아간다고 치자. 그럼 또 똑같은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르지. 여기에서 딱 열 명 사이에서 있으면서 느꼈던 그런 감정들. 아니, 당신은 왜 우리랑 안 어울려? 저 사람, 좀 이상하지 않아? 철수(가명)씨는 그렇게 사회성이 없어서 대체 이 험한 세상을 대체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래? 모두들 삶을 잘 살아가는 비범 한 자락 쯤은 알고 있어서 나에게 기를 쓰고 나눠주려는 그 모습들, 내가 괜찮다고 했는데도, 나는 내가 누군지 알고 내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만 할지 잘 알고 있다고 얘기했는데도, 또 그렇게 얘기하면 짜증을 내면서, 사람이 얘기를 하면 좀 들어야 되는 것이 아니냐고, 예의로라도. 나는 아무에게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았는데, 당신들은, 왜?

자, 이제 돌아가면 그런 사람들이 한 백 만명 쯤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그래서 뭐 어쩌라고? 과연 앞으로 내가 어떤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될지, 나도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이젠 그런 사람들의 그런 얘기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하는 얘기가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고, 또 그런 얘기 들어봐야 내가 거기에 맞추기 위해 내가 아닌 것으로 되기 위한 바보짓 따위는 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고… 그런데 뭐가 그렇게 두려워?

그러게, 난 정말 뭘 그렇게 두려하고 있는 것일까.

영화를 보고 쌀국수나 먹을까 차를 남쪽으로 몰고 내려가면서, 뭔가 고정된 것, 머무르는 것에 대한 욕구를 너무 많이 가지고 지난 몇 년간 살아왔다는 사실에 부끄러워졌다. 아 그랬구나, 라는 새삼스러운 깨달음, 아니면 나 자신에 대한 발견, 아니 확인. 삶을 힘들게 만드는 건 행복에 대한 기대감이 빚어내는 그 어두운 그늘이었고, 그 그늘은 기대를 하는 내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었던가… 조금 생각을 하고 싶어서 음악을 틀지 않고 고속도로를 달렸다. 이천 불이나 가까운 돈을 들여 고친 차는 지난 주까지 그랬던 것처럼 죽어가는 노인네 기침 뱉어대는 것 같은 소리를 내지 않았다.

쌀국수를 먹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영화의 한 장면처럼 십 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학교, 스튜디오였는지 그의 사무실이었는지, 나는 교수와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 생각에, 너는 똥을 싸서 뭉개는 경향이 있어. 시간이 지나면 앞으로 좀 나아가야 할 것 아냐? 뭔가 프로젝트에 발전도 없고… 교수님, 저도 제가 그렇게 건축에 뛰어난 사람이라고 생각은 하지 않지만, 전 정말 이걸 꼭 하고 싶어요. 정말 스스로, 아 나는 이 바닥에 남아있을만큼의 능력은 있구나, 정도 생각할 수 있을 만큼의 자신감만 있었으면 좋겠어요.

…… 그래서 그렇게 십 여년이 지나, 늘 자신감 없어왔던 나와 싸워가면서 걸어온 길의 오늘, 내가 서 있는 자리는?

 by bluexmas | 2009/02/06 15:15 | Life | 트랙백 | 덧글(4)

 Commented at 2009/02/06 20:54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02/07 14:23 

네, 영화 꼭 보세요. 이왕이면 ‘레저베이션’ 해서 보시면 더…^^

물론 10년 전 비만 아동이었던 저에 비하면 지금의 제가 훨씬 마음에 들죠. 자동차는 돈을 좀 써서 고쳤더니 노인네에서 40대로 젊어졌답니다.

 Commented at 2009/02/07 18:11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02/08 14:28 

히히 알고 있어요. 그냥 웃자고 한 얘긴데 기분 상하신 건 아니죠? 뭐 어쨌든 길이 있고 집만 있으면 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