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바람

오전 내내 자다가 점심을 먹고 새 집 청소를 했다. 워낙 혼자 건사할 수 없는 집에 살아왔더니 이 정도 아파트를 치우는 건 그렇게 힘든 일로 느껴지지 않는다. 집 주인이 겨우 한 달만 살고 이사간 집이라 기본적으로는 깨끗한데, 어제 이사를 하면서 남은 신발 자국들이 잘 가시지 않는다. 어제 짐이 나가자 마자 쓸고, 청소기를 돌린 뒤 걸레질을 했는데 영 마음에 들지 않아서 어제 사온 락스를 물에 섞어 다시 한 번 걸레질을 했으나 그래도 지워지지 않는 얼룩들이 꽤 많이 보여 신경이 쓰인다. 뭐랄까, 그  무지막지하게 큰 집에 살면서 언제나 내가 원하는 만큼 청소하고 살 수 없는 것에 대해 아쉬워 했는데 이제 그게 가능한 규모의 집에 사니까 좀 유난을 떠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걸레질을 마치고 나니 일단은 신발을 벗고 다닐 수 있을 만큼은 깨끗해져서, 마루에 앉아서 인터넷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어제 바로 인터넷 신청을 해서 서비스를 들여 놓기는 했는데,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선도 잡힌다.  마루 베란다의 창문을 살짝 열어 놓았을 뿐인데 바람이 솔솔 들어온다.  바람이 이렇게 들어오는 집이라니, 기분은 좋은데 아직까지도 뭔가가 계속 낯설게만 느껴진다. 이 바람도 낯설다.  요즘의 기분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1호선 역에서 이사한 뒤 두 번째로 향하는 집으로 데려다 줄 전철을 기다리는 듯하다. 기다리는 곳은 서울 외곽 북쪽의 어딘가, 또 내가 가야만 하는 곳은 서울 외곽 남쪽의 어딘가… 기다리고 있는 곳은 아주 낯선 곳이고 가야할 곳은 그것보다는 덜 낯설지만 그래도 꽤 낯설은 곳. 집으로 향하는 전철은 내가 승강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막 발을 디딜 때 떠났고, 그 다음 전철은 20분 뒤에, 플라스틱 의자에 엉거주춤 앉아있는 내 앞으로 나와 상관없는 전철들이 계속 지나가면서 던져 주고 갔던 바람이 바로 이런 낯선 느낌이었던가…? 가방 속에는 기나긴 여행을 대비해서 책이 한 권 있었지만 그건 왠지 꺼내 읽기가 싫어 나는 그 며칠 전에 만나서 점심을 같이 먹었던 사람에게 문자를 보냈었지, 아무도 모르는 역에 이렇게 있으니까 기분이 좀 그런데요? … 그래요? 뭐 그런거 가지고 ㅋㅋ, 그러나 그렇게 점심을 같이 먹었을 때 외로움이나 쓸쓸함을 입에 주워 담았던 사람은 내가 아니었는데. 나를 낯선 곳에서 아주 약간 덜 낯선 곳으로 데려다 줄 전철을 기다리는 20분 동안 나는 전화번호와 그 전화번호에 딸린 사람의 존재, 그리고 기억을 지웠다.  그리고 그 대신 외로움이나 쓸쓸함 따위를 입버릇처럼 말하는 사람들은 사실 진짜 외로움이며 쓸쓸함 따위가 무엇인지 모를거라는, 어떤 종류의 인간들에 대한 회의를 심었다.

 by bluexmas | 2009/04/19 17:22 | Life | 트랙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