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ewhere Not Here
어제는 일부러 아무 것도 쓰지 않았다. 쓰는 게 안 즐거웠던 적은 하루도 없었는데 하루 쯤은 아무 것도 안 써 보고 싶었다. 쓰고 싶은 욕망을 억눌러 보고 싶었다. 사실은 피곤해서 뭔가 쓰기가 어려운 날이었다. 오전 열 시가 되기 전에 집을 나서서, 밤 열 한 시가 넘어 집에 돌아왔다. 강남역에서 대치동을 거쳐 서울대 입구, 목동, 홍대앞을 거친 긴 여정, 거기에 신도림 역에서의 삼십 분 넘는 급행 전철을 기다린 건 그 하루에 잘 어울리는 부록이었다. 물론 나는 오산에 산다. 서울 어디에 붙어 있는 오산동 같은데가 아닌, 경기도 오산시.
나는 강남역으로 데려다주는 열 시 이십 분 버스에 올라탈 그 때 까지도 짜증이 잔뜩 난 상태였다. 저렇게, 정말 하루 종일 돌아다녀야만 하는 상황이었으면서도 그 전날 일찍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직도 사람 미칠 만큼 난장판인 집을 정리한 것도 아니었다. 아직도 분명히 ‘얘가 언제쯤 빵을 구워다 줄라나’ 라고 생각하실 아버지의 압력을 좀 잠재워 보고자 식빵을 한 덩어리 굽고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사실은 그걸 하고 나니 아무 것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숙제 끝나고 나니 힘이 빠져서 집 청소는 하고 싶지 않은 것 처럼. 그래서 잠이 모자란, 그 짜증나는 기분으로 깨어난 아침이었는데, 두 양반이 출근 길에 잠시 들러서 시험삼아 구운 식빵과 다른 것들을 물물교환하기로 했다. 아, 어차피 나가야 하니까 그 차를 얻어 타고 가야겠네, 라는 생각에 그렇게 잠을 못자고 간신히 일어나서 준비를 하려는데, 이 양반들이 아홉시 반에 오신다고 하시고는 아홉시 십 오 분에 떡허니 오셨다. 난 아직 씻지도 못했는데.나가기 위한 준비의 동선과 시간 등등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 순간 머릿속으로 나갈 준비를 하는 데 걸리는 시간과 마을버스, 그리고 강남역행 버스의 시간 등등을 맞춰 보았으나 아무 것도 아귀가 맞지 않았다. 아, 또 아침부터 뒤엉키는 건가? 결국 두 양반을 보내고 미친 듯이 준비를 해서 열 시 이십 분 버스를 탔지만, 마음 속은 뒤죽박죽이었다. 게다가 어제의 복장은 여러가지 이유로 회사 다닐 때의 그 반팔셔츠와 면바지 차림, 직장인 로퍼까지. 하루의 시작부터 숨이 턱턱 막혔다.
다행스럽게도 버스가 출발하면서 냉방을 틀자 싸구려지만 시원한 공기 덕이었는지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럴 때면 듣던 노래들을 골라듣기 시작했다. Alpha의 노래는 이런 때에만 들어왔다. 앨범을 다 듣기에는 너무 가라앉고, 너무 길고, 너무 지루하니까. 그래도 이럴 때 들으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이들은 트립합이 유행하던 시절에 세상에 나왔는데,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버스는 달린다. 나는 계속해서 노래를 듣는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낀다. 이렇게 덥지만 따뜻한 오리털 이불로 포근하게 감싸주는 듯한 느낌, 비록 이렇게 덥지만 그래도 언제나 두 팔 활짝 벌려 맞이하고 싶은 그런 따뜻함. 새로 산 이불을 덮고 오늘 밤 잠을 푹 자고 나면, 포근하게 눈을 덮어 쓴 채로 내일 아침이 너를 기다릴거야. 물론 늦잠도 괜찮아, 와 같은 느낌의 따뜻함. 그러나, I remember when you came, I can just recall that day. 나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아니다. I dream, I see your face, I see and dream of you. 그러나 나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아니다. You were safe and warm, I was in your hands. We were moved in time to another space.그러나 나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아니다. Somewhere, not here. Somewhere, not here. So, little time. So, little time. 그러나 나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아니다.
Somewhere, not here.
그러나, 나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아니어왔다.
…그 이후의 하루는, 다행스럽게도 순조롭게 흘러갔다. 강남역에서 대치동을 거쳐 서울대 입구, 목동, 홍대앞을 거친 긴 여정, 거기에 이런 하루에 잘 어울리는 부록과도 같았던 신도림 역에서의 삼십 분도 넘는 기다림까지. 멈추지 않고 쌩쌩 달리는 열차, 좋았다. 저녁의 바람도, 조금 습했지만 아주 시원했다.
# by bluexmas | 2009/06/23 10:34 | Life | 트랙백 | 덧글(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