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과 끝에 관한 상세 묘사

하느님 하느님, 제발 저에게 답을 주셔요. 조용한 기차 안에서 이어폰 없이 디엠비를 보는 인간은 대체 어떻게 해야 되는 걸까요? 물론요즘 정세가 정세인지라 시시각각 변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싶은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기차 안에서 뛰어내리거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러나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물론 그가 있는데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없어서 아예 가능성이 없는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한 편으로는 내가 “무신론자에 한없이 수렴하는 냉담자(월간 <에스콰이어> 12월호 참고)”라서 그가 대답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고 나는 알 수 없었다. 포기한채로 음악을 들었지만 그 음악 밑으로는 그가 깨버린 고요의 조각들이 고막을 찌르는 듯한 환각 또는 환청에 시달렸다. 다행스럽게도 집에 오는 길은 짧았다. 이쪽을 겨누고 있는 미사일이니 뭐니 하는 거대하고 더 위험한 것들보다 그렇게 눈 바로 앞에서 벌어지는 자질구레한 것에 짜증이 나는 경우가 더 많다. 그것은 아마도 작은 것들은 어떻게든 바꿔 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

아침 일찍 나서야 하는 날에는 늘 잠의 비듬을 제대로 털지 못한다. 어젯밤 잠을 잘 못자서 그런 것이었다. 게다가 새벽 네 시 반에 바카란지 뭔지 하는 도박 광고 스팸 문자 때문에 잠을 또 깼다. 디엠비보다 더 악질이라서 정말 이런 놈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신에게 묻고 싶었다. 그러나 역시 이번에도 그는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아침 일찍 일어났는데 결국 늦어서 택시를 타야만 했다. 아침에 쓸데없이도 <바늘 없는 시계>의 원작자 이름을 찾아보고 있었다. 나는 요즘 영어 또는 영역 소설 101선의 목록을 나름대로 만들어 전자책 킨들을 통해 2년 정도에 걸쳐 읽겠다는 계획에 부풀어 있다. 몇몇 목록들을 참고하고 초등학교때 읽었던 고전들 가운데 열 권 정도를 더할 생각이다. 그래서 아침에 뜬금없이 인터넷을 뒤졌다. 한참을 뒤져서 결국 찾아 냈으나(그것도 옛날의 그 금성출판사 홈페이지에서!), 글을 쓰는 지금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 페이지를 즐겨찾기에 담아두었다. 그래도 이름은 기억난다. ‘카슨’이었다. 여자인데도. 마침 조지아 주 컬럼버스 출신이라고 했다. 이제야 그 옛날 읽으면서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조금씩 이해할 것 같다.

어쨌든 그렇게 늦게 나와서 버스 시간에 맞춰 간신히 오는 택시를 잡았다. 다섯 발짝 앞에 세워 뛰어가는데 잠의 비듬이 바람에 날렸다. 버스에는 서울에 가는 학생이나 직장인들이 많았고 의외로 자리가 대부분 차 있었다. 이 사람들 사이에 있으려니 나도 보다 더 입닥치고 묵묵히 사회에 공헌하는 인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의외로 뿌듯했다. 내 옆자리에는 화장을 아주 곱게한 여학생 둘이 앉아서 셀카를 찍으면서 지난 주쯤 뱅을 쳐서 이제 막 자리잡은 것 같은 앞머리를 매만지며 들여다보거나 잡담을 나눴다. 이제 조금씩 기성세대의 어두운 터널로 떠밀려 가는 나잇대의 사람으로서 두 고운 여학생의 미래가 아주 밝아보여 흥분이 되는 나머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2008년 여름, 아루스에서 사려했으나 카드를 읽지 못해 못 샀던 전자음악그룹의 노래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약을 먹어 ‘하이’해진 패크맨이 괴물을 잡아 먹으러 갈때 깔면 딱 좋은 노래들이었다.

집에 돌아오는 기차 안, 영등포에서 모령의 여자 승객이 옆자리에 앉았는데, 바로 아이폰을 꺼내 ㅋㅋㅋ와 ㄷㄷㄷ를 날리며 누군가와 채팅을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은 외로움의 존재 따위는 개한테나 줘버려라고 마음 속으로 선언하고 언제나 어디에서나 누군가와 물리 또는 가상적으로 같이 있기를 원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현대사회, 특히 땅이 돈인 우리나라에서 외로움은 사치니까 기회 닿을때 많이 누려보세요, 라고 해 봐야 미친놈 너나 잘해, 라는 소리를 들을 뿐이다. 나의 삶은 여자 승객보다 나은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내 피부는 많이 나은 것 같아 나름 안심이 되었다. 그것도 지난 번에 이마 한 가운데에 나서 급한 성질에 뜯어버려 흉터가 남으려고 하는 여드름 이후 그 왼쪽 옆으로 두 개가 더 난 것까지 감안했을 때의 상태였다. 아, 내 피부 상태의 10퍼센트만이라도 나눠 주면 참 좋겠다. 나 같은 남자가 피부는 좋아서 뭐에다 쓰게, 라고 생각했다가 왠지 아까워서 그럼 5퍼센트만? 4퍼센트만? 3퍼센트만? 하다가 어차피 모르는 사람인데 알게 뭐야! 라는 결론을 내리고 출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 내가 신은 구두는 나도 가지고 있었는지 모르는 것이었는데 그 또각거리는 소리가 은근히 두드러져 조용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하도록 만들었다. 이건 구두지 디엠비가 아니니까 좀 너그러워들 지세요, 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자동문의 스위치를 눌렀다. 그러고 보니 이 구두는 완충은 적당히 해 주지만 아직도 길이 덜 들어 오래 신으면 발뒷꿈치의 껍질을 벗기는 것이었다. 신발을 신은지도 어언 열 두시간이 다 되어가는 찰나, 기차가 오산역 플랫폼에 들어섰다. 누군가 ‘오산 많이 좋아졌다, 기차도 서고’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났다. 그렇게 말할 것 같이 생긴 남자가 있나 둘러보았지만 오늘 통로에 서 있던 남자들은 그저 다 표를 일찍 살 수 없는 사정에 처한 정도로 밖에 생기지 않아 보였다. 오늘은 소심해서 말도 없는 나의 도시가 상처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편했다. 절룩거리며 계단으로 향했다.

 by bluexmas | 2010/12/01 23:50 | Life | 트랙백 | 덧글(14)

 Commented by 英君 at 2010/12/02 00:26 

비틀즈 노래에 있잖아요.. 성모께서 하신 지혜의 말씀~♬ 내비둬~♪

-_-)/ 고생하셨어요. 그래도 바꾸려고 고생하시느니 참느라 고생하시는 게 그저 수월하다고 봐요.. ‘-‘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12/08 23:40

그런 걸까요? 사실 바뀌는 경우가 거의 없기는 하지요…

 Commented by 차원이동자 at 2010/12/02 07:30 

음소거버튼을 살포시 눌려줍시다. 아니면 판다치즈처럼…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12/08 23:40

판다치즈가 뭔지 잘 모르겠네요. 저도 음소거 핸드폰을 씁니다. 그냥 귓구멍을 막아버려서…

 Commented by 아스나기 at 2010/12/02 08:17 

항상 그럴때마다 ‘아오 저게 나를 음해하려는 악의를 깔고 나를 은글슬쩍뭉긋하게 괴롭히는건 아닐거야! 다만 쟤는 잘 모를뿐이라서 그럴거라고!’라고 저를 다스립니다 🙁

아니 다스리려고 노력하죠. ㅠㅠ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12/08 23:41

그렇죠 다스리려고 노력하죠… 저도 음악을 너무 크게 들으면서 다니는 건 아닌가 돌아볼 필요는 있습니다…

 Commented by 풍금소리 at 2010/12/02 11:44 

오우.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디엠비를 이어폰 꽂지 않고 보는 인간,이어폰 꽂았는데도 음악 소리 크게 들리는 사람…모두모두 너무 싫어요.

함께 하는 공간에서만은 예의를 지켜줬으면 좋겠구만…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12/08 23:42

멋진 글은요 >_< 그냥 처음부터 다 잘못된 것 같습니다. 저도 잘못된 것 같아요. 뭐가 맞는지도 잘 모르겠네요-_-

 Commented by 허멜선장 at 2010/12/03 10:14 

으윽, 이 음악은 뭥미? 이런 걸 이어폰 없이 듣는 인간 옆에 앉아 있을 생각하면…한번은 전철안에서 핸펀으로 오락하면서 그 죽음의 뿅뾰뵹 소릴 내는 녀석이 있어서 한 마디 했더니, 그냥 씹더만. 못 참는 내 성격, 야 ㅅㅂ 당장 안 끌래? 그랬더니 녀석이 흘끔 날 보더니 왈 ” 이번판만 깨고 끈다니까욧!”

우습게도 어떤 날은 나도 모르게 부러진 팔 깁스를 쳐들고, 지랄했더니 버스 안이 모두 조용…아, 졸지에 조폭되면서 분위기 평정했더랬다. Y, 한팔에 가짜 깁스를 하시게. 그리고 방언을 하시게. 기차 안이 조용할 터이니…힘에는 힘으로….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12/08 23:43

아, 이 음악은 제가 좋아하는 건데요-_- 그렇게 말대꾸하면 핸드폰을 빼앗아서 이마를 한 대 갈기시는 것도… 그나저나 팔은 어제 부러지셔가지고;;; 정말 가짜 깁스를 하나 만들어서 들고 다녀야 할 것 같습니다. 지난 주에 지하철에서 아주 조용하게 복음을 전하는 젊은이가 있더라구요.

 Commented by 백면서생 at 2010/12/04 18:13 

아직 수양이 덜 되어 그때마다 꼭 한 마디 합니다. 신기한 것은, 그때마다 바로 다들 ‘네, 죄송합니다’ 하고 번개같이 끄더군요(기억에 네 번 정도 그랬던 것 같은데). 이건 누군가 뭐라 할 수 있다는걸 나름 짐작하고 긴장하고 있었다는 뜻이지요. 그럼 처음부터 켜지 말 것이지 확 그냥… -.-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12/08 23:44

서생님께서는 기성세대 같아 보이시니까 그런데 저같은 사람들이 말하면 웬만해서는 잘 듣지도 않지요. 따져보면 또 듣는 것 같기도 하고… 뭐 어쨌든 좀 그렇습니다-_-

 Commented by 풍금소리 at 2010/12/09 11:59 

그러게요…..아,,,잠시 잊었는데 그 카슨,의 이름은 찾았나요.

마침 제가 이동도서관에서 읽고 있던 책<불안감에 시달리는 소년>의 작가가 카슨 맥컬러스네요.맞죠?

그 사람의 저서에 바늘…머시기가 있네요.

이런 우연이…!!!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12/15 23:45

네 맞아요 카슨 맥컬러스. 50세에 세상을 떠났다네요. 평생 지병으로 고생…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이런 저서들이 있어요. 바늘 없는 시계도 굉장히 공허했던 기억이 나요. 우연도 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