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의 트라우마를 딛고-짚락(Ziploc) 티라미수
아주 오랜만에 내가 만든 음식 포스팅. 안 만드는 건 아닌데 잘 못 올리고 있다.
티라미수. 만들기 아주 어려운 디저트는 아니다. 원한다면 불을 안 쓰고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트라우마가 있다. 3~4년 전 야심차게 시도했다가 개밥 같은 곤죽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다시 만들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아무개 식당의 디저트로 나오는 것을 먹고는 눈물을 흘리며, 언젠가 이 티라미수의 발치에라도 쫓아갈 수 있는 걸 만들어보겠노라고 마음 먹었다. 이 티라미수는 스폰지케이크가 들어간, 얌전한 티라미수가 아니다. 레이디 핑거를 넣고, 커피맛이 그야말로 양 싸대기를 사정없이 갈겨대는 것이다.
커피(와 술)이 들어가서 티라미수의 이름이 뭐 이탈리아어로 ‘pick me up’이라더라, 라는 이야기가 가장 많이 돌아다니는데 근거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티라미수가 처음 나타난 건 1980년대라고 알고 있다. 길게 늘어놓으면 귀찮으니까 일단은 넘어가자. 어쨌든, 원래 티라미수는 큰 그릇에 잔뜩 만들어 파티 같은데 내놓고 국자로 퍼먹어야 제맛인데, 그렇게 많이 만들기도 귀찮거니와 혼자 사는 마당에 잘못 만들었다가는 사흘 내리 매끼 그것만 먹어야 될 것 같아서, 일단 조금만 만들어보기로 했다(마스카르포네의 비싼 가격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었다. 250그램에 6,500원이다. 크림치즈? 어림도 없다. 사실 마스카르포네는 치즈가 아니고 크림이다. 발효를 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맛도 없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잔뜩 굴러다니는 짚락(ziploc)이었다. 딱 내 취향이라고나 할까? 갈 시간도 없지만 방산시장에서 파는 플라스틱 용기들은 대부분 한 번 더 포장해야만 한다. 게다가 그 디자인이나 그림은…;;
원래 티라미수의 크림에는 사바용(sabayon, 또는 자발리요네 zabalione), 그러니까 물 중탕에 노른자를 살짝 익히는 커스터드가 들어간다(아무개 레스토랑에서도 거의 사바용 정도로 묽은 소스가 올려 나온다. 이건 한판씩 만드는 게 아니라, 나갈때 마다 1인분씩 조합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어렵지는 않지만 귀찮을 수 있는데, 익히지 않은 노른자로도 대체 가능하다(대신 가급적 싱싱한 계란을 써야 한다. 마트에 가서 새로 사왔다;;). 내가 커피와 함께 마르살라가 들어가는데, 커피의 향을 생각한다면 브랜디나 다크 럼, 심지어는 위스키까지 가능하다. 그래서 사실은 싱글몰트를 넣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그건 너무 미친 짓 같아서 일단은 그만두었다. 그러나 다음에는 도전해 볼 생각이다.
다음은 레이디핑거(또는 saboiardi). 예전에 처참하게 실패했던 가장 큰 이유는, 일단 이 레이디핑거가 너무 물렀기 때문이다. 이름은 같지만 레이디핑거도 조금씩 달라서 폭신한 것과 딱딱한 게 따로 있다. 딱딱한 걸 사야 커피에 견딘다. 우리나라에서 살 수 있는 건 기본적으로 딱딱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봐야 커피에 오래 견딜 정도로 딱딱하지는 않으므로, 절대 오랫동안 담가두지 말고, 하나씩 살짝 적신 다음에 바로 꺼내야 한다. 한 면당 3초 정도? 담그자마자 커피를 쭉쭉 빨아들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한 면이 7~8센티미터 정도 되는 작은 짚락에 두 켜로 만들었는데, 전부 세 통을 만들었다. 레이디핑거는 한 통에 여섯 개. 단가가 만만치는 않다. 맛이 한데 어우러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므로, 적어도 반나절은 냉장고에 모셔두는 게 좋다. 다음 날 먹어봤는데, 일단 옛날의 처참한 실패로 얻은 트라우마는 씻을 수 있었다. 정말 크게 한 판 만들어, 어디 파티 같은데 싸들고 가서 막 퍼 나눠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커피는 물론 술도 잔뜩 넣어서.
# by bluexmas | 2011/05/16 09:24 | Taste | 트랙백 | 덧글(21)
비공개 덧글입니다.
훌륭한 티라미수입니다 크크-
양 많은 티라미수 먹어본 적이 언제인지 가물가물하네요. 베를린의 주말장터에서 눈맞으며 이탈리아 아저씨가 파는 2유로 티라미수 먹는데, 뻥안치고 서울 매장에서 파는 것의 6배는 나와서 먹다 체할뻔 했습니다;;
가끔 제과점에서 파는 원형의 완전 고체에 가까운 티라미수 참 싫었어요
그런 게 아니더라도 균형이 깨지면 치즈향이 좀 느끼하더라구요 커피향 진한 티라미수 멋집니다!!
팔아봤는데, 사람들이 그 맛을 몰라서 아무도 안사먹었더라는 슬픈 전설(?)이 있죠.
결국 요즘에는 메뉴에서 내리고 제가 들르기 전에 한번씩 미리 리퀘스트를 넣어놓으면
만들어 주곤 합니다. 그 맛을 모르는 사람들에겐 아직 머나먼 티라미수의 맛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