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귀를 닮은 마음
급한 김에 흰 티셔츠를 입고 나가는 실수를 저지를 뻔했다. 문을 열고 나갔다가 깜짝 놀라 다시 들어와 갈아입었다. 요즘 내 마음은 까마귀를 닮아 흰 옷을 입으면 자꾸 까만 가루가 묻어난다. 물론 집에서는 상관이 없지만, 밖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주면 곤란하다. 자영업자의 길을 걷기로 한 것도 가급적이면 남들처럼 출퇴근을 하지 않기 위해서였는데, 다음 달에는 빼도박도 못하고 그래야만 해서 좀 걱정이 많다. 일단 까만색을 위시한 짙은 색의 티셔츠를 좀 많이 준비해두었다. 땀까지 나서 가루가 엉기면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다.
마음 때문에 반짝거리는 것들 물어오기를 좋아하게 되었다. 금도끼냐 은도끼냐 아뇨 쇠도낀데요 뭐 그런 이야기도 있지만 형편이 어려워서 그런지 금이나 은보다는 스테인레스가 좋다. 무엇보다 싸지만 반짝거리기는 금, 은에 뒤지지 않고 관리하기도 한결 수월하다. 이름마저 스테인레스 아닌가. 녹이 슬지 않는다. 저렴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만큼 몸이나 마음이 가난한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도 없다. 너무 변하지 않아서 나중에는 지쳐버리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가난한 사람에게 변덕부릴 수 있는 권리마저 사치라고 해서는 안된다. 너무 가혹하다. 어느 누구에게라도, 마음마저 방황하지 말라고 하는 건 가혹한 처사다. 언제부터 삶이 그렇게 고결했나. 시간이 지나면서 때가 안 묻는 삶은 삶이 아니다.
오늘은 동대문에서 을지로에 가는 길에 있는 주방용품 도매상에 들러 거품기를 샀다. 보기만 해도 왠지 마음이 풍요로와지는 크기에 너무 탄탄하게 잘 만든 거품기가 오천원이라니! 어차피 필요하기도 했지만 아니었더라도 샀을 것이다. 너무 마음에 들어 생일선물 또는 크리스마스 카드 대신으로 하나씩 보내고 싶을 정도다. 잘 보면 한 가닥을 원형으로 꼬아 전체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만들었다. 여러 종류의 거품기를 시험하는 비디오를 보았는데, 가운데에 작은 공을 넣은 것은 효과가 전혀 없다고 한다. 오히려 액체를 더 많이 튀게 한다고. 어쨌든, 음식을 만들지 않는 사람이라면 어깨를 두드리는데 써도 좋을 것 같은 거품기다. 영 쓸모없지만 소유하고 싶은 물건이 잉여의 핵심인데 이 거품기가 내게는 그랬다. 하지만 어째 그 반짝거림이 살짝 모자른 것 같아 정말 반짝거리는 식판도 하나 더 샀다. 단 한 번도 식판에 음식을 담아 먹겠노라고 마음 먹어본 적이 없다. 불편해도 공기에 따로따로 담아 먹는 게 좋다. 하지만 요즘은 왠지 그래야 될 것 같은 압박을 느낀다. 원래 설겆이를 싫어하지만, 싱크대가 낮아서 더 하기 힘들어 결정을 번복할 수 밖에 없었노라고 핑게를 댈 생각이다, 물론 스스로에게. 하지만 아직도 결정하지는 않았다. 그냥 반짝거리는데 하나 더 필요했을 뿐이다. 굳이 식판을 고른 이유는 가격에 비해 넓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카트를 보려고 들른 길이었다. 공간을 최대로 활용하려면 필요할 것 같은데, 조립식 이케아 같은 건 쿨하기는 해도 내 취향은 아닌 것 같아서 그냥 진짜 주방에서 쓰는 무식하고 튼튼한 걸 보러 갔다. 이케아보다 10만원 싼데 열 배는 튼튼한 것이 있었다. 직접 만드는 건데 바퀴에 브레이크를 달려면 만 원만 더 내면 된다고 했다. 당장 살 상황은 아니어서 일단 후퇴했다. 이른 저녁으로 냉면을 먹고 홍대에 들러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집으로 돌아왔다. 느긋하게 움직였지만 채 삼십 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훌륭했다. 집으로 가는 길이 너무 멀면 집까지 미워하게 된다. 그러면 안된다. 혼자 머물 수 있는 공간은 그야말로 최후의 보루이기 때문이다. 공간도 돈이라 혼자 머물 수 있는 공간도 그만큼의 경제적인 여력이 없으면 얻을 수 없다. 그래서 혼자만의 공간에 덩그러니 있어 외롭다고 불평하면 안된다. 공간이 돈이니 결국 그 공간으로 얻게 되는 외로움도 돈이다. 정말 평온했으면 하는 순간에 다른 사람의 기운이 공기에 섞이는 걸 알아차리는 그때의 기분. 평온을 깨는 다른 사람의 존재도 싫지만 그걸 느끼는 나 자신이 더 버거운, 그런 기분.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이제는 외로움도 돈 주고 사는 세상이 되었으니까. 하긴, 모든 게 지겨워서 떠나는 여행도 사실은 돈 주고 외로움을 사는 격 아닌가. 살 수 있으면 다행이다. 번잡함이나 외로움이나 만이 천원짜리 함박이나 거품기나 식판이나 모두모두. 그래도 마음만 까마귀를 닮은 건 차라리 다행이다. 몸까지 닮게 되는 그날에는 시커멓지만 새가 되었으니 어디라도 날아가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릴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뭐 날 수 있다고 어디를 가겠느냐만. 그래도 새보다는 사람의 삶이 좋다. 사람 아닌 것, 나 아는 사람의 삶을 동경하고 싶지는 않다. 잘난 구석 하나도 없지만, 고집은 그냥 부리고 싶다. 그래도 사람, 그래도 나. 다른 생물이나 사람의 삶이 부러웠다면 벌써 내 손으로 접었을 것이다. 때때로 죽이도록 밉고 꼴보기 싫어도 그냥 끌고 간다. 스스로의 멱살을 단단히 부여잡고서. 그때 이미 그러기로 마음 먹었다. 내가 이기나, 아니면 내가 이기나. 끝까지 끌고 가서 보자고.
# by bluexmas | 2011/05/21 00:01 | Life | 트랙백 | 덧글(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