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약한 좌절의 순간
어제 운동을 하면서 딸린 텔레비젼 채널을 돌리다가 렌조 피아노에 대한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새로 지어진 샌프란시스코의 과학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그와 그의 건물들을 조명하는… 2006년 말, 샌프란시스코를 여행 갔을때 드 영 박물관 맞은편에 지어지고 있는 건물을 보며 저건 뭘까, 궁금했었는데 알고 보니 무려 렌조 피아노의 건물이었다. 건축하는 사람치고 렌조 피아노 싫어하는 사람이 없을거라 믿어지지만, 나도 워낙 좋아하는 건축가라 그의 건축물만 보러 여행을 떠났던 적도 있었고… 하여간 당연하게도 온통 찬양 일색-물론 그 정도 찬양이야 마땅히 받으실 수 있는 양반 아닌가-인 프로그램을 보고 있노라니 자전거 타다 말고 가슴 한 구석에서 어떤 좌절감 같은 것이 싸하게 밀려왔다. 물론 직업이라는게 돈을 벌기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건축이라는 직업의 특성을 생각해 보면 내 직업의 최종 결과물이 가져오는 사회적인 영향, 달리 말하자면 공익 따위를 염두에 안 둘 수 없는 것인데 어째 내가 일했던 회사나 관여했던 건물들 모두 그런 것과는 너무 거리가 멀었던 것 같았으니까. 아, 이걸 달리 말하면 ‘보람이 없는 일을 했어’ 가 되겠구나. 그렇다, 어째 보람이 없는 일을 계속해서 하다가 내쳐진 듯한 기분이구나, 이 기분이 바로… 내가 마지막으로 관여했던 뭐 상도 받았네 디자인이 독특하네, 라며 주목이라도 받았다고 다들 떠들어대던 그 건물은 두 번 씩이나 Schematic Design만을 거치고서는 경제 악화의 은총을 입어 취소되다시피했다. 그리고 나는, 주차장을 계속해서 고치며 그래도 말이 되는 주차장이 결국 아주 말이 안 되는 초특급 혼란 상태 chaos의 길로 접어드는 전과정을 지켜보았다. 아니, 사실은 지켜본게 아니라 만든거지, 내가. 위에서 주는 스케치를 바탕으로. 내가 생각하기에 조금 더 보람있는 일을 했더라면 내쳐질 때도 조금 덜 아쉬웠을까? 할만큼 했으니 그래도 아쉽지 않구나, 뭐 이렇게? 그래도 내가 도면에 불어넣은 영혼은 앞으로 지어질 건물들에 깃들여 영원히 숨을 쉴…하하하.
지난 주였나? 막 회사에서 감원당했을 때 이리저리 날렸던 이력서를 보고 어떤 회사가 연락을 해 왔다. 별 건 아니었고, 이력서를 봤는데 몇 가지 더 궁금한게 있다고 물어보는 정도. 그게 왜 또 하필이면 이런 일들이 벌어질거라고 예상도 하지 못했던 그 시절, 회사를 옮겨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가장 가고 싶다고 생각했던 회사였다. 어차피 미국에 있지도 않는데다가 나처럼 비자가 필요한 사람을 찾는 것 같지도 않으니 연락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겠지만 그래도 사람 일이라는게 어떻게 될지 모르고 또 직업이랄지 이런데에 관련된 상황에서는 내가 할 도리는 언제나 해야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 사람들이 필요한 만큼은 답을 해줬다. 검토를 하고 연락주겠다고 다시 응답을 받기는 했지만 그건 그냥 의례적인 대답일 뿐이라는 걸 나도 알고는 있고, 또 나도 지금은 여기에서 움직이지 않는게 여러모로 나은 상황이니까 별 생각은 없었다. 한 번 정도 스스로에게 물어보기는 했지, 뭐 그런 상황이 오면 다시 갈래? 라고. 글쎄, 어떻게 해야 될까.
사람을 그리워하지는 않고 있지만, 그래도 일이나 내 책상, 그리고 점심 먹고 산책했던 바로 그 렌조 피아노의 건물 등등이 그리워질 때는 있다. 그게 결국 내가 건축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일까? 라는 물음에는 쉽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을 것 같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그건 결국 건축 자체가 싫어서가 아니라 1. 내가 건축에 미달되는 인간이라서, 2. 건축 바닥에 몸담고 있는 뻔뻔스러운 사람들이 싫어서, 일 것이다. 아주 떠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나는 뭘 해서 이 바닥에 발을 걸치고 살 수 있을까? 라는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그런 생각을 하다가 창 밖으로 보이는 건물이며 도시에 가끔 진저리를 칠 때가 있다. 우리가 사는 공간을 이렇게 만든 사람들 역시 나처럼 ‘아, 나는 보람이 없는 일을 했어?’ 라고 생각은 할까, 아주 가끔이라도?
# by bluexmas | 2009/05/10 08:54 | Architecture | 트랙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