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취업의 이유(2)-짬밥과 약밥
구나. 정대리는 그의 자리로 천천히 걸어 다가갔다. 정대리가 다가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봐”
“…”
“이보라구”
“…?!”
두 번째 부를때, 정대리는 그의 어깨에 손을 살짝 댔다. 그가 그제서야 고개를 들었다.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지만 선천적으로 감출 수 없는 짜증이 살짝 배인 표정이었다.
“…?”
“아니 뭐, 앞으로 한 팀에서 일 같이 하게 될 텐데 커피라도 한 잔 마실까 해서. 나가자구.”
‘나가자구’의 ‘자’와 ‘구’를 내뱉는 사이, 정대리는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그러면서 뒤를 흘끔 돌아보았는데, 그는 세 번째 돌아볼때가 되어서야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정대리는 벌써 열 발짝이나 앞서 있었다. 벌써 점수 깎이고 들어가는데 그러시면 곤란할텐데. 그러나 정대리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게 행동할 수록 조금씩 더 신이 났다. 트집잡을 건덕지가 많으면 많을 수록 트집도 더 즐겁게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째 불쏘시개쯤은 하루 이틀이면 다 모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 정대리는 오른쪽 구석에 등을 세우고 서 있었고 그는 허리를 살짝 굽힌채로 핸드레일에 몸을 구부정하게 기대고 서 있었다. 오직 둘 뿐이었다. 엘리베이터가 5층을 지나쳐 내려가자 그가 한 마디, 던졌다.
“…백재훈이라고 아시죠?”
“…”
“그놈이 내 대학 2년 후밴데, 연합동아리 같이 했죠? 어제 연락해봤더니 대뜸 같은 학번이라던데.”
이 새끼 봐라. 정대리는 그렇게 눈치가 빠른 편은 아니었지만 그가 무슨 메시지를 전달하려는지는 단박에 눈치챘다. 백재훈은 정말 정대리와 같이 연합동아리를 했던, 같은 학번 동기였다. 그러므로 굳이 나이를 따지자면 정대리는 그보다 두 살 아래였다. 만약 그가 재수를 했다면 세 살 아래일 수도 있다. 그는 그 사실을 돌려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이 어린 거 알고 있으니까, 섣불리 건드리지 말라는 얘기겠지. 글쎄, 그게 네 마음대로 될 것 같냐? 어디에서 한량 노릇이나 하면서 건축 짬밥도 쌓지 못한 주제에? 정대리는 그를 흘겨보았으나 벽을 보고 있었으므로 눈흘김은 별 의미가 없었다.
이윽고 엘리베이터가 로비에 멈춰섰고, 정대리는 2층에서부터 문 바로 앞에 서 있다가 열리는 문을 몸으로 거의 비집고 열다시피하며 빠져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아까 정대리의 부름을 받고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였던 것과 비슷한 빠르기로 걸었다. 곧 그와 정대리 사이에는 다시 다섯 발짝의 거리가 생겼다.
“캔커피?”
자판기 앞에 다다르자 정대리가 9첩 반상이라도 사겠다는 듯한 호기가 서린 말투로 그에게 물었다.
“캔커피 안 마십니다만.”
“그래? 그럼 뭐 다른 거라도 마시겠나?”
“저는 밖에 나오면 물 밖에 안 마십니다.”
그럼 그러시든지. 정대리는 자기 몫의 캔커피를 뽑아 들고 건물 문을 나섰다. 셔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먼저 그에게 내밀었다. 그는 그냥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대리도 별 대꾸 없이 입으로 담배갑을 열어 젖혀 한 개피를 꺼내서는 불을 붙였다. 이제는 두 발짝쯤 좁혀진 거리에 있는 그 쪽으로 첫 연기를 시원하게 뿜었다.
“부장님한테 대강 얘기는 다 들었다구.”
“…”
“뭐 이거저거 하다가 건축일도 손에서 몇 년 놓았다고 하시던데.”
“…”
“군대 갔다왔으면 알겠지만, 그, 군대에서 나이 순으로 조직이 돌아가나? 아니지, 짭밥 순이지. 먼저 입대해서 짬밥 많이 먹은 놈이 나이 상관없이 나중에 들어온 놈한테 상관 노릇하는 건, 그 조직이라는 것이 경험을 높이 사준다는 의미 아니겠어? 사회생활 해 봤으니 잘 알겠지만, 사회라는 곳도 결국 마찬가지고 회사조직이라는 것도 결국 군대랑 다를 바 없잖아? 뭐 나한테 하대받고 싶지 않은 심정이야 내가 충분히 이해하는데, 그래도 내가 경험이 더 많으니까 결국 대우를 해줘야 하는 것 아니겠냐구. 윗분들의 생각도 그렇다고 나는 알고 있고.”
“…”
“뭐 다 먹고 살려고 회사 다시 기어들어온 거 아니겠어? 그러니까 좀 꼽겠지만 월급봉투를 봐서라도 우리, 잘 해보자구.”
정대리는 담배를 왼쪽 입에 문채로 말하면서 그의 왼어깨를 툭, 쳤다. 담배연기가 그의 눈에 들어갔는지, 그가 얼굴을 찡그렸다. 정대리는 다 피운 담배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자, 그럼 들어가서 뭘 할 수 있을까 좀 보자구.”
먼저 몸을 돌려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내딛으려던 순간이었다.
“후송 가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정대리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고개를 숙인채 였다.
“군대병원에서도 짬밥이 통하죠. 어느 부대에서 오거나, 병원에 얼마나 머물렀거나에 상관없이 일병은 일병이고 상병은 상병인데-“
거기까지 말하고 그는 고개를 들었다. 웃고 있었다. 웃기는 웃되, 기뻐서가 아니라 비아냥거려서 웃는 얼굴이었다. 꽤 많이 올라간 왼쪽 입꼬리 때문에라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짝다리를 짚고 말을 이어갔다. 두 손은 여전히 주머니에 넣은 채였다.
“단 한 군데, 예외가 있는 곳이 있죠. 정신 병동이라고. 거기에서는 짬밥 안 쳐줘요. 약밥이 최고지. 병장이라도 약밥 한 달 먹었으면 석 달 먹은 이등병 말 들어야 하는데, 뭐 군대며 조직 입에 담는 분이면 그거 모를리 없겠죠?”
뭐야 이 새낀. 정대리는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 서 있었다. 그가 자기에게 처음으로 건넨 말이 이런 내용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대리는 예상 외의 반응에 잠깐 당황했다.
“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네, 다 먹고 살려고 회사 ‘기어’들어왔으니 잘 해보시자구요. 아, 그럼 매일 아침 출근할때 건물 로비에서부터는 기어서 들어가야 되나?”
지나쳐가며 그는 정대리가 그랬던 것처럼 정대리의 어깨를 툭, 쳤다. 정대리는 거의 무게 중심을 잃고 그대로 넘어갈 뻔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로비쪽을 들여다보니, 그는 벌써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이건 처음부터 불쏘시개 따위가 필요 없는 상황이었다. 정대리는 두 주먹을 꽉, 움켜 쥐었다. 이 새끼.
# by bluexmas | 2010/03/20 22:19 | — | 트랙백 | 핑백(1) | 덧글(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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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기대합니다.
현실과 상상을 넘나드는 교묘한 스토리가 재밌어요 낄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