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유병, 시계, 성적표 그리고

몽유병 분명히 시계를 차고 있다고 약속장소로 향했다고 생각했다. 여러 번, 시계를 풀었다 다시 찬 기억이 있었다. 금속밴드의 그 딸깍, 하는 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손목이 허전함을 느끼고서는 다시 스타벅스로 되돌아 갔던 것이다. 물론 그 자리에 시계는 없었다. 시계는… 차에 있었다. 나는 정말 꿈에서도, 내가 시계를 차에다 풀어놓고 갔을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초등학교 성적표에 늘 ‘머리가 아주 나쁜 건 아닌데 엄청나게 산만하다’라는 식의 평가를 달고 왔던 나이니만큼 어디에서 뭔가 잊어버리고 다니는 것쯤은 늘 벌어지는 일이… 사실 요즘은 아닌데. 아무 것도 안 잊어버리고 있지만 어느 시점에서 무엇인가를 잊어버리거나 아니면 무슨 사고를 칠 것만 같은 불안함을 계속 안고 산다. 그건 하지 않던 너무 많은 것들을 한꺼번에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디를 가든, 거의 대부분 처음 차를 몰고 가는 곳이다. 내비게이션이 열심히 안내를 해주지만, 거기에 맞춰서 운전은 내가 한다. 매일 저녁 다른 사람들을 만난다. 뭐 그런 것들. 나는 미친듯이 분열되어 있는 가운데 또한 미친듯이 한 가지만 생각한다. 사실, 이제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나는 산만했던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쓸데없이 너무 많은 것들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게 그건가? 잘 모르겠다.

시계 만약 오늘 시계를 잃어버렸더라면 시계를 다시 차기 시작한 이후로 두 번재가 되는 셈이었다. 작년 가을엔가, 시계를 다시 차기 시작하자마자 가장 만만하게 차고 다닐만한 걸 잃어버렸다(아마도 글로 쓴 적이 있을 듯?). 차는 게 어색해서 풀다차다를 되풀이하다가 스르륵 사라졌다. 지금 가지고 있는 시계들 모두 비싼 거랑은 거리가 멀고 또 각각 웃기지만 쓸데없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어서 어쩌면 누가 나 모르는 사이에 싹 집어가줬으면 하는 것들이기는 하다. 오늘 잃어버린 줄 알고 있던 시계는 근 10년쯤 전-대학 3학년?-에 강남역 아트박스에서 산 것이다. 십만원쯤 줬었나? 거기까지. 내가 가지고 있는 시계들 가운데 거의 가장 비싼 축에 속하는 듯. 남자의 패션은 시계로 완성된다던데 그렇다면 나는 남자가 될 자격도 능력도 없다. 늘 하는 이야기처럼, 비싼 시계를 찰 돈도 없지만 어차피 두꺼운 시계는 찰 수도 없다.

성적표 왜 이렇게 하느냐고 누가 물어본다면, 이렇게 아니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될지 몰라서 한다고 밖에 대답해 줄 수 없다. 다른 생각을 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당분간은 뭔가 이렇게 하고 싶다. 그 기간이 끝나고 났을때 상황이 조금 나아졌으면 좋겠다. 오늘 성적표를 받았는데, 거의 모든 과목의 점수가 양 아니면 가였다. 뭐야 그렇게 유난 떨었는데 고작 점수는 그거야, 의 느낌? 근데 유난이라도 안 떨고 가만 있다가 양, 가 받으면 더 싫을 것 같다. 나의 주특기는 원래 삽질과 발악이었으므로.

그리고 욕망의 울부짖음에 얼마만큼의 성의를 보여주어야 하는가. 그건 아마도 평생 짊어지고 가면서 대답해야 될 과제와 같은 것? 욕망아 나무라지 않을테니 답은 고사하고 힌트는 좀 주는 게 어떨까, 어느 정도의 수준에서 너와 내가 적절히 타협을 볼 수 있을지 나도 좀 알게, 나도 지친다니까. 마음의 준비는 아주 오래 전부터 되어 있으니.

 by bluexmas | 2010/07/16 01:02 | Life | 트랙백 | 덧글(4)

 Commented by 안녕학점 at 2010/07/16 02:48 

성적표가 이사하기 전 집, 예전에 살던 집 주소로 되어 있는데

이게 전산처리가 안되고 학교 학사지원부까지 부득불 가서

수정해야한다기에 내버려뒀어요. 발송기간 맞춰서 적당히 가지고

와야겠다는 생각이었는데 문제는 그 기간이 언제인지 모르겠어요.

그 집 부부가 뜯어보고 아, 이 여자애 참 노는 것 좋아하네

혀를 차고 있을 지도 모르겠네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07/18 01:36

크 남의 성적표 뜯어보는 사람의 평가 따위는 무시하셔도 괜찮습니다. 경우가 없은 건데요 뭐.

 Commented at 2010/07/16 23:34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07/18 01:37

저는 요즘 정말 늘 정줄을 놓고 사는 기분입니다. 비공개님도 기운 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