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자요리 4부작(2)-우리나라 분자요리의 현주소
‘분자요리라는 명칭도 이제는 슬슬 농담거리가 되어가고 있는 + 그게 뭐든지 한다는 음식점도 별로 없는+ 한다고 내세우는 음식점마저도 조금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딱한 수준인’ 현실의 삼박자. 기술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나도 같은 말을 계속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다들 한식 분자요리, 한식 분자요리 하길래 지면에 넣으려고 내가 생각하는 한식 분자요리라는 것의 컨셉트 스케치를 제안했었다. 물론 조리는 가능할 것이다. 우리나라 분자요리의 현주소를 파악하려면 세계 분자요리의 현주소를 먼저 파악해야될 것 같아 도입부에 살짝 언급했다. 바로 밑의 ‘핵심기술’은 지면에 박스기사로 들어간 것인데 본문 전에 읽으면 기사 또는 분자요리의 이해에 도움이 더 될지도 모르겠다.
분자요리의 핵심기술
이제는 손가락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난 분자요리의 핵심 기술을 몇 가지만 손가락으로 꼽아보면 다음과 같다.
조리(가열 또는 냉각을 통한 물성 변화)
가열
수비드(Sous Vide): ‘Under Vacuum’ 이라는 의미의 불어로 끓는 점 이하의 낮은 온도에서 재료를 조리, 세포파괴와 수분 손실을 전통적인 가열을 통할 때보다 억제한다. 세균 증식 방지와 고른 열전도를 위해 재료를 진공포장한다.
냉각
1.액화 질소: 영하 200°C에 이르는 온도로 재료를 순간 냉각, 즉석 아이스크림 등을 만들 수 있다.
2.냉동 번철(Anti-Griddle): 일반적인 번철이 재료를 가열한다면, 냉동 번철은 영하 34.5°C의 저온을 이용, 액체를 원반형태로 얼린다.
구체화(Spherification) 캐비아’ 또는 그보다 큰 구체로 만들려는 액체에 일정 비율의 알긴산염을 넣어 염화칼슘을 넣은 액체에 흘려주면, 알긴산염을 넣은 액체의 표면이 젤화되어 굳는다.
교질화(Gelification) 일반적으로 익숙한 질감의, 엉긴 액체 상태를 만든다. 한천, 젤라틴, 카라기난, 메틸셀룰로오스 등의 재료를 쓴다
유화(Emulsification) 마요네즈처럼, 섞일 수 없는 두 다른 속성의 액체를 섞는 과정. 대두에서 뽑은 레시틴을 쓴다
증점화(Thickening) 점도를 향상 시킨다. 로커스트 콩 검, 아라비아 검, 구아 검 등.
거품(Espuma/Foam) 레시틴을 섞은 액체를 핸드 블렌더로 섞거나(커피나 탄산음료를 컵에 따랐을 때 생기는 거품의 질감), 아산화질소를 충전하는 거품기에 넣고 뿜어준다(소프트 아이스크림의 질감).
단백질 접착제(Meat Glue) 트랜스글루타미나아제(tranglutaminase). 단백질의 조직을 단단하게 연결시켜준다. 서로 다른 고기를 붙이거나, 다진 생선살이나 고기를 주사기에 넣어 가는 국수형태로 뽑을 때 쓴다. 게맛살의 재료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분자요리의 현주소
세계 분자요리의 현주소
우리나라 분자요리의 현주소에 대해 알아보기 이전에 세계 분자요리의 현주소부터 간단하게나마 알아보는 것이 맞는 순서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사라진 레스토랑 슈밍화를 통해 거품이나 액체 질소를 이용한 급속 냉각 기술을 사용한 요리가 ‘분자요리’라는 딱지를 달고 사람들을 놀라게 만든 지도 몇 년, 그 동안 세계 분자요리의 지평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는 것 두 가지를 뽑자면 첫 번째는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듯, 핵심 기술의 대중화이다. 1970년대로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만큼 오랜 역사(일본 프로그램 ‘철인 요리왕(아이언 셰프)’에서는 벌써 15년 전, 이 기술을 이용하는 셰프가 등장한다)를 지닌 ‘수비드’로 조리한 음식은 우리나라에서도 이제는 어렵지 않게 맛볼 수 있으며, 미국에서는 압력밥솥 크기의 가정용 기기가 선보였다. 터무니 없는 가격이라는 생각은 지울 수 없지만 집에서 캐비아나 젤리, 거품 만들기에 도전해 보려는 사람에게는 페란 아드리아의 이름을 달고 나오는 실험키트도 있다. 페란 아드리아는 물론 말할 것도 없지만, 그랜트 아케츠(알리니아/미국), 헤스톤 블루멘탈(팻 덕/영국) 또한 각각의 조리 세계를 집대성한 요리책을 펴내 레시피를 공개했다. 또한 국내에서 출간된 <분자요리의 첫걸음> 역시 꼭 필요한 기본 기술을 구현하는 방법을, 바탕이 되는 기본 원리와 함께 짚어주고 있다. 물론 이런 책들이 아니더라도, 영어에 조금만 익숙하다면 인터넷을 통해 많은 자료를 찾을 수 있게 된지도 오래다. 이러한 대중화로 인해, 분자요리라는 용어 그 자체의 의미나 경계선도 자연스럽게 희미해지는 것이 두 번째로 두드러지는 변화이다. ‘보그’지의 음식 칼럼니스트 제프리 스타인가튼은 2008년 12월 본인의 칼럼에서 “한두 단어로 규정하기 힘들지만 짜증나는 ‘분자요리’라는 단어도 쓰기 싫어서” ‘초현대 요리(hypermodern cuisine)’이라는 용어를 제안했다. 또한 에르베 디스와 함께 분자요리를 위한 과학 지식의 단초를 제공한 해롤드 매기-<On Food and Cooking>의 저자-또한 “분자요리라는 용어에는 본질적인 의미가 없으며 워크샵과 같은 것들을 지칭하는데 쓰여야만 하는 것이지, 요리의 스타일이나 조리 방법을 일컫는 용어가 아니다. 평범한 미식가들은 분자요리라는 용어에 매력보다는 반감을 느낀다”라고 밝힌 바 있다. 이렇게 분자요리라는 용어 아래 함께 각광을 받았던 셰프며 과학자들이 하나 둘씩 용어의 늪에서 발을 빼려는 가운데,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나날이 대중화되고 있는 기술이며 정보는 분자요리라는 용어의 사용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해도 누구의 요리를 그 울타리 안으로 얼마만큼 끌어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가장 좋은 예로 토마스 켈러(프렌치 런드리/퍼 세, 모두 미국)가 자신의 요리에 적극적으로 수비드를 끌어 들이고 수비드 조리의 교과서처럼 인식되는 책 <Under Pressure>를 펴냈다고 해서 아무도 그를 분자요리를 하는 셰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큰 그림을 보았을 때 프랑스 요리를 선보이고, 그의 조리 세계를 더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그러한 기술들을 도구로 쓸 뿐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분자요리의 현주소는 바로 이러한 관점을 바탕으로 파악해야만 한다. 분자요리는 스타일인가?
우리나라의 분자요리(?)
지난 몇 개월에 걸쳐 자의든 타의든 상관없이 이름 뒤에 분자요리의 꼬리표가 따라다니는 레스토랑 몇 군데를 들러보았는데, 한 군데를 빼놓고는 다분히 실망스러운 경험이었다. 그나마 조리상태나 서비스를 비롯한 다른 부분에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수준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실망의 골이 전체적으로 아주 깊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파워 블로거’들의 주도 아래 블로그 세계에서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 내는 요인의 실체가 무엇인지 파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필자는 왜 실망했을까? 음식을 평가하는 기본적인 사항 즉 기술이나 컨셉트, 실행 등을 바탕으로 크게 두 가지의 원인을 꼽을 수 있다. 첫째, 일단 요리를 통해 선보였던, 사람들을 열광하게 만드는 분자요리의 요소라는 것이 필자의 기준에서 볼 때 더 이상 분자요리의 울타리 안에만 가둬두기에도 민망한, 지극히 기본적인 거품이나 젤리와 같은 것들의 반복에 불과했다. 물론 기술은 요리뿐 아니라 어떤 예술 분야에서도 충분조건에 불과하지, 필요조건은 아니다. 바꿔 말하자면 기술을 가지고 있다면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낼 확률이 높아지지만, 기술이 맛있는 요리를 무조건 보장해주지는 않는다는 의미이다. 1990년대 중반 너바나를 위시한 얼터너티브 밴드의 출현을 지켜본 세대라면, 그 당시 치열하게 벌어졌던 ‘커트 코베인 대 잉베이 말름스틴’의 논쟁을 기억할 것이다. 잉베이 말름스틴의 팬들은 커트 코베인과 너바나의 음악에는 화려한 속주와 같은 기술이 결여되었다며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커트 코베인을 빛나게 했던 건 장르에 무관하게 기본적인 코드 스트로크와 주악절의 단순 반복에 불과한 솔로만으로도 <Smells Like Teen Spirit>과 같은 곡을 쓸 수 있는 작곡능력이었다.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의 동계 올림픽 라이벌 전은 어떠했는가? 물론 두 선수 모두 공히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을 갖추고 있기는 했지만, 여자 피겨 스케이터로는 궁극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는 ‘트리플 악셀’ 그 자체가 비록 더블 악셀이지만 탄탄한 기본기와 연기 전체의 조화와 균형을 추구했던 김연아를 꺾고 아사다 마오에게 금메달을 안겨주지는 못했다. 기술이 전부는 아닐지언정 그 특수성에 의해 기술적인 측면이 더욱 부각되어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모으는 분자요리이건만, 자의 또는 타의에 의한 것인지에 상관없이 우리나라에서 분자요리라고 불리는 것들의 대부분에서는 일단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답습만이 반복되고 있을 뿐 참신함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두 번째로, 그렇게 답습하듯 적용되는 기술조차 제대로 된 연구와 실험이 없이 보여주기 위해 끼워 넣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엘 불리나 팻 덕, 그리고 알리니아와 같은 레스토랑들이 세계적인 유명세를 치르는 이유는, 거듭 말하지만 그 기술들 자체가 신기해서가 아니라 그 기술을 통해 이뤄내는, 맛으로 대표되는 미식의 경험이 신기하기 때문이다. 분자요리에서 이러한 경험들은 ‘탈바꿈 (transmogrification)’ 또는 ‘눈속임(Trompe-l’œil)’으로 통칭되는 것으로, ‘커피와 도넛’이라고 이름 붙여진 디저트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늘 마시는 액체 상태 커피와 먹는 고체 상태의 도너츠 짝짓기를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그 고정 관념을 뒤집어 도넛처럼 생긴 커피맛 젤리와 도넛의 맛을 지닌 액체를 짝짓거나 도넛의 맛을 지닌 액체 위에 커피 거품을 올리는 경우와 같은 예를 들 수 있다(요약하자면 ‘A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B인 것’이 될 수 있겠다). 음식을 통해 이러한 경험을 창조하려면 두 가지 측면의 이해가 필수적인데, 첫 번째는 기술의 뒤에 숨어 있는 원리의 이해이다. 위에서도 수비드의 짧지 않은 역사에 대해 짧게 언급했지만, 분자요리의 기본 개념이나 요소들은 눈 깜짝하는 순간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가장 기본적으로 쓰이는 첨가물들만 해도 이미 오랫동안 파인 다이닝계와 대척점에 존재하는 식품 공업계에서 시간과 환경, 또는 물성의 극복을 통해 빠른 대량생산을 추구하고자 쓰여온 것들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거나 신경 쓰지 않았을 뿐이다. 예를 들어 ‘카라기난’이나 ‘잔탄 검’은 샐러드 드레싱이나 아이스크림 등의 점성이나 식감을 향상하는데 쓰이며, 누구나 아는 젤라틴이나 그보다 더 안정적으로 굳으면서 식물성이라는 이유로 요즘 부쩍 많이 쓰이는 한천은 바로 그 우뭇가사리에서 추출된 것이다. 거품을 내는데 쓰이는 ‘레시틴’은 유화제로 거의 모든 초콜릿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미국의 몇몇 셰프들 사이에서 레시피의 독창성을 놓고 작은 논쟁이 벌어졌던 ‘사이버 계란’은 알긴산 염을 쓴 ‘구체화(spherification)’ 기술의 좋은 예인데, 사실 몇 년 전 화제를 불러 일으킨 중국산 짝퉁 계란 역시 기본적으로는 같은 원리로 만든 것이다. 이렇듯 많은 부분에서, 기술 구현 그 자체를 위한 해법은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정보의 형태로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약 거품을 내고 싶다면 현존하는 레시피를 찾아 액체와 레시틴을 적정 비율로 섞고, 핸드 블렌더로 저어주면 그만이다. 그러나 문제는 단순히 거품을 내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레시틴이 어떤 원리로 거품을 만들어 주며, 그러한 거품이 단순한 액체 상태와는 질감이 어떻게 다른가를 파악 및 이해하고, 그를 바탕으로 자신의 요리에 응용하는 방법론을 세우는 단계까지 가지를 뻗쳐나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는 학창 시절 치를 떨게 만들었던 화학이나 물리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포함해서, 끝없는 시행 착오를 굴하지 않고 반복해서 그 지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끈기까지 갖추어야만 한다(여기까지 읽고 음식 하나 만들기 위해 이 모든 거창한 것들까지 필요하냐고 되묻는 사람이라면 음식을 통해 완벽을 추구하려 들거나, 그러한 완벽을 맛 볼 자격이 없다고 말하고 싶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세상에 쉬운 일 하나 없듯 분자요리 또한 마찬가지이고, 오히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그 본질을 파악하기란 한층 더 어렵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한 술 더 떠, 가장 기본적인 맛과 재료에 대한 이해 또한 필수이다. 다양한 해석과 설명이 가능하지만, 분자요리의 핵심은 바로 재료가 가진 물성의 변화를 통해 기존의 그것과는 다른 조합을 꾀함으로써, 새로운 차원의 미식 경험을 가능하도록 돕는 것이다. 자연 상태 그대로 이루어진 맛의 조합이 뛰어난 재료들이 물성 변화의 과정을 거쳐 재조합 했을 때 전혀 다른 느낌이거나 아예 어울리지 않는 경우도 생길 수 있고, 물론 그 반대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또한 물성 그 자체만을 변화시켜 식감이나 온도의 변화만으로 맛은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다른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한데, 이런 경우 모두 재료의 본질을 이해해야만 창조하고자 하는 맛이나 경험의 본질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한 레스토랑에서는 간장의 맛을 바탕으로 한 불고기 양념 맛의 ‘에스푸마(Espuma, 거품)’을 겉만 지져 얇게 저민 쇠고기와 상추 위에 얹어서 전채로 냈는데, 아산화질소의 힘을 빌어 액체가 부피를 얻자 쇠고기와 상추를 짓눌러 두 재료 고유의 식감을 느끼는데 방해를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게다가 간장과 참기름의 맛 또한 거품의 식감을 통해 전달될 때 그 무거운 느낌이 한층 더 강조되어, 차라리 통상적인 양념간장이나 비니그렛의 형태일 때보다 못했다. 또한 다른 레스토랑의 경우에는 특히 수정과를 재해석한 디저트가 인상적이었는데, 일단 젤리로 굳혀 식감을 바꾼 수정과 위에 계란이 주 재료인 커스터드와 제누아즈(스폰지 케이크)를 수정과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차가움이나 이나, 계피의 매운 느낌이 주는 상쾌함 모두가 거세되어 수정과라는 음식의 본질을 아예 잃어버린 다른 음식이 되었다는 느낌 밖에는 가질 수 없었다. 이 두 경우 모두 남들과 다른 것을 보여주기 위한 시도 그 자체가 요리를 압도하는, 본말전도의 상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실 분자요리와는 전혀 상관없이, 큰 그림에 해당하는 코스 전체를 짜는 요령 부족도 두드러졌지만, 이는 비단 분자요리를 낸다는 레스토랑에만 국한된 주제가 아니므로 기회가 닿는 대로 다른 지면을 통해 보다 자세하게 다룰 생각이다.
섣부른 범주화의 함정
마지막으로, 분자요리는 정말 스타일인가? 모래에 선을 긋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므로 누군가는 분자요리를 우리가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프랑스/이탈리아/중식/한식 등, 상식적인 범주-이러한 범주화 또한 상당 부분, 계속되는 세계의 엔트로피 증가 및 ‘크로스오버’ 경향과 더불어 그 의미가 전만큼 없어지지 않았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거나 한층 더 나아가 그 위에 군림하는 스타일로 규정하고 싶겠지만, 그러한 시도는 분자요리라는 방법론의 특수성 때문에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본말전도의 상황을 불러 일으키거나 미식의 경험 자체를 목적에서 수단 지향적인 것으로 변질시킬 우려가 있고, 사실은 그게 바로 많은 셰프며 평론가들이 이제 더 이상 ‘분자요리’라는 용어 자체의 사용을 기피하려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므로, 별 다른 고민 없이 분자요리의 딱지를 붙여주기 전에 심사숙고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어떤 소비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생산자에게 세상에서 가장 멋진 이름표를 달아주기 원하고, 또 어떤 생산자는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한 수단으로 그러한 이름표를 자발적으로 원할지도 모르겠지만, 얼핏 보기에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듯한 용어라고 할지라도 한계는 내재하고 있기 마련이라서 궁극적으로는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세계를 좁히는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염두에 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
# by bluexmas | 2010/08/21 09:01 | Taste | 트랙백 | 덧글(7)
비공개 덧글입니다.
인류의 요리법이라는것이 수많은 실례로서 검증되고 또 그러한 경험의 누적에 따라 점진적으로 개선되어 온 것인데, 그것들을 전부 밟고 위로 올라서거나, 또는 새로운 범주로 기본의 것을 묶는 등,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 ‘분자요리’라는 것이 기능하기에는 다소 미비한 점이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