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긋지긋한 ‘왕년’드립
한 회사에서 한 가지 일만 하다가 은퇴한다면 그것도 멋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아버지 세대에는 그런 경우가 잦았다. 나의 아버지도 그런 길을 걸으셨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힘든 것이 요즘 현실이다. 여러가지 이유로 회사를 옮기기도 하고, 또 기타 다른 여러가지 이유로 아예 다른 업종에 종사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아마 나도 ‘굳이’ 가른다면 그런 경우에 속하게 될 것이다.
막말로 ‘쩔게’ 허세 떨어줘야 남들보다 다른 존재로 인식되는 것처럼 느낄 수 밖에 없는 요즘 사회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설정이 ‘아 내가 왕년에 잘 나갔는데(혹은 잘 나가는 직장에 다녔는데), 너무나도 하고 싶은 일이 생겨서 그것도 박차고 나와서 이걸 한다’라는 것 같다. 비록 타의에 의한 것이기는 했지만 결국 비슷한 상황에 처했기 때문에, 개인의 행복이라는 차원에서 본다면 그런 사람들의 결정에 기뻐하지 않을 수 없지만, 일단 결정 그 자체가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었으면 된 거지, 왜 꼭 그런 드립을 사족처럼 덧붙이는지는 솔직히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A라는 직장에 다녔다고 하자(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사실조차 모른다. 본인이 말 안 하면 모르지 않나?). 그러면서 B라는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 둘 사이에서 갈등을 하다가 결국 A를 버리고 B의 길을 가기로 한다. 그러면서 ‘사실은 제가 잘 나가는 A라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는데, B라는 일이 너무 좋아서 결국 그걸 버렸습니다…’라고 꼭 ‘커밍아웃’을 한다.
뭐 그래서 어쩌라고? 이런 설정의 패턴을 계속 보고 있노라면 두 가지 생각이 드는데, 첫 번째는 그렇게 커밍아웃을 하는 과정에서 갈등의 원인이 B라는 업종의 열등함이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셈이 된다는 것이다. ‘아 제가 A를 할때는 나름 잘 나가고, B를 하면 돈도 못 벌고 그렇게 잘 나가지도 못할 거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그게 너무 좋아서…’ 그럼 원래 B의 직업군에 있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열등한 상황에 있다고 처음부터 인식했다는 것일까?
그리고 두 번째 생각은, 이러한 커밍아웃이 초점을 흐리는 개인 브랜딩 또는 마케팅의 작업이라는 것이다. 왜 A를 버리나? 답은 간단하다. ‘B가 좋아서’일 것이다. 그럼 B를 열심히 잘 해서 성공하면 된다. 나 개인적으로는 B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면 결국 승부는 B로 순수하게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꾸 거기에다가 A를 했다는 마케팅의 양념을 얹어서 B를 하는 능력 외의 것으로 더 메리트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그저 얕은 꾀라고 생각한다. A라는 일을 하는 동안 배운 인생 또는 직업의 경험을 십분 발휘해서 B에 적용하는 것과 그냥 A라는 일을 했음을 마케팅의 양념으로 쓰는 것은 다르다. A는 누구에게 보여주기 이전에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상황이다. 어차피 인생은 크게 봐서 하나의 유기체이고, 경험을 통해 배운 것들은 두루두루 쓰일 수 있으니까.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솔직히 B라는 일을 잘 하는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단지 그걸로 하나의 이야기 거리를 더 만들어서,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능력에 상관없이 남들과 다르게 보이는데(‘포지셔닝’하는데?) 도움이 될 뿐이다. 물론, 그런 것도 능력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기는 있을 것이다. 그렇다, 그것도 능력일 수도 있다. 적어도 얕은 꾀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로 가득찬 세상이라면.
마지막으로 이러한 과정에서 가장 웃기다고 생각하는 건, 뭘 채 시작도 하기 전에 그런 것부터 빵 터뜨려서 사람들의 관심을 유발하려는 전략이다. 좀 거친 비유가 되겠지만, 포도를 심던 땅에 새로 감자 파종을 하면서 ‘원래 포도주를 담글 포도를 재배해서 단위 면적당 정말 엄청난 수익을 내던 땅이었는데요, 감자가 너무 좋아져서 견딜 수 없어 포도밭을 밀어버리고 감자를 심기로 했어요’ 라고 성급하게 마케팅부터 하려는 격으로 보인다. 그런 이야기는 감자 싹이 나서 잘 자라 수확할 때가 되어서 해도 늦지 않다. 결국 사람들에게 줘야 할 것은 자신의 이상을 반영한 맛있는 감자지, 스스로 버린 과거의 영광인 포도의 사연이 아니다. 막말로 포도를 가꾸던 땅이 바로 감자에게 적응해서 원하는 결과물을 준다는 보장도 없고, 그래서 제대로 된 감자를 못 낸다면 그 전에 포도를 가꿨는지, 아니면 산딸기를 가꿨는지는 정말 알 바가 아니다. 그때쯤 되면 사람들은 그게 포도였는지, 감자였는지, 아니면 산딸기였는지 또 그것도 아니면 그렇게 말하던 사람이 누군지도 기억 못하거나, ‘아 뭐 포도 갈아엎고 감자 키운다고 파종할때부터 큰소리 뻥뻥치더니 고작 내놓는 건…’하고 원래 감자 키우던 사람보다 더 비웃게 될 것이다. 부메랑은 반드시 돌아오고, 어떤 경우에는 원래 날카롭지 않던 날개의 날이 바람에 단단하게 벼려져, 발화자의 가슴팍을 찌르게 되는 경우도 있다. 누군가 신중하든 안하든 솔직히 내가 알 바는 아니다. 다만 나는 거슬리는 게 싫다. 선택은 각자 다 알아서 한 거다. 그러니 티 좀 그만 내자 지겹다.
# by bluexmas | 2010/10/24 00:31 | Life | 트랙백 | 덧글(8)
비공개 덧글입니다.
…라고, 아마 제가 저한테 관대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덧글을 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하는 것이 이제는 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혹시 저 자신에게 관대해지자는 차원에서 제가 이런 글을 쓴다고 생각해보지는 않으셨는지요?
일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을 나라 밖에서 보내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말씀하신 것처럼 차라리 술자리 같은 것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제가 술을 꼭 마시고 싶어서가 아니라, 이런 이야기는 덧글을 통해서 주고 받았을때 오해할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매체를 통해서 보기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불러주시면 기꺼이 술자리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잘나가던 직장은 아니었고 그냥 평범한 회사였지만
버리고 온 휴가가 아까워서 아직도 지금 직장 분들에게는 엄살 부리는 1인.
(제가 버리고 온 휴가가 몇갠데요!!! 막 이런 억지드립 1년째 날리고 있어요 ㅋㅋ)
그러지 말아야겠습니다. ㅎㅎ 잘 읽고 가요~
비공개 덧글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한 요지는, ‘비공개님과 술자리라도 가지면서 이야기 나누고 싶다’가 아닙니다. 그것 자체가 싫다는 것이 아니라 제가 꺼낸 이야기의 전제조건이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의사소통이라면 이런 식으로 일방적이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말씀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저는 책을 낸다 뭐다 해서 제 이름이 뭐고 어떤 사람인지 이 블로그 바깥으로도 알려져 있지만, 비공개님은 그런 상황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비공개님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러한 종류의 의사소통을 시도하는 것은 제가 올린 음식 사진을 보고 ‘님, 음식 정말 맛있어 보이긔’라는 덧글을 다는 것과는 달라집니다. 즉, 비공개님의 진정한 의도가 어떤 것인가를 떠나 저 개인적으로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의 가장 싫어하는 말인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충곤데…’와 같은 형식으로 저에게 다가올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예전에 첫 번째 책 나왔을때 관련해서 보내주셨던 메일도 저는, 그 배려와 배려 뒤의 의도에 감사했지만 무슨 말못할 사정이 있으신 것인지 본인이 누구신지는 안 밝혀주시는 이유에 대해서는 솔직히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가 진짜 잘 되기를 바라시는 마음에서 무엇이든 말씀하시는 거라면 어디에 사시는 무엇을 하시는 분인지쯤은 이야기하시는 편이, 본인이 말씀하시는 것의 설득력을 높이는 차원에서 필요한 조치가 아닐까, 하구요. 비공개님께서도 오해받지 않으려면 그러는 것이 나을텐데, 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는지요? 혹시 이 덧글을 읽으시고 그 연장선 상에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다른 매체나 방법을 통한 것으로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