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부른 이별
똥파리도 아니고 용파리가 득시글거린다는 대한민국 서울의 어느 기차역 근처에서 부품들로 태어나 서투른 주인의 손에 조립되어 바다까지 건너 지난 6년 동안의 생사고락을 같이 한 내 컴퓨터… 조금만 시대에 뒤쳐지면 버림받는 일반적인 컴퓨터의 팔자를 생각해볼때 참 오랫동안 주인을 보필해왔던 것도 영광이라면 영광일텐데, 가라니까 그냥 조용히 물러나기는 싫었는지 결국 주인의 피를 맛보고서야 별로 한도 없었을 법한, 그리고 거듭 강조하지만 컴퓨터로서는 긴 삶을 마쳤다. 억지로 성대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사운드카드와 200기가 상당의 하드 드라이브를 토해놓고서.
어제 오후, 드디어 옛날 컴퓨터를 집 앞에 들고 나가 안에 쌓인 먼지를 털어주고 필요한 부속품을 꺼낸 뒤 다시 집으로 들고 들어와야만 했는데, 손으로 들고 깎을 수 밖에 없는 잔디깎이로 길게 자란 잡초들을 한참 깎아 주었더니 왼팔이 후들거려서 집까지 다 들고 들어와서는 오른발위에 컴퓨터를 착지시키고 말았다. 보기에는 흉하지만 그렇게 아프지는 않은 발등의 찢어진 상처 세 군데와 약간의 타박상… 이 녀석, 정말 내 곁을 떠나기 싫었던 것일까.
계획대로라면 어제 모든 데이타 이전 작업을 마쳤을텐데, 새 컴퓨터를 뜯고 나니 모든 저장장치가 SATA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아득해졌다. 예전 컴퓨터의 것들은 모조리 IDE-133이니까 호환 불가… 거기에 광드라이브 하나를 더 달 수 있게 되어있는 두 번째 슬롯은 판대기로 막아놨는데 이게 도저히 떨어질 것 같지 않다. 떼봐야 어차피 SATA가 아니므로 달 수도 없었겠지만… 뭐 그뿐인가. PS/2 단자도 없어서 USB로 바꿔주는 아답터를 살 때까지는 쓰던 무선 키보드/마우스를 쓸 수도 없다. 새 컴퓨터 쓰기 어렵다는 생각이 절로 새어나온다고…
어쨌거나 단 며칠동안 써보고도 단언할 수 있다. 비스타는 멍청한 운영체계다. 이제서야 미국 텔레비젼에서 나오는 Mac vs. PC 광고의 의미를 알 것 같다. 비스타의 그 모든 보안 장치들이 돌아가는 꼬라지를 보고 있으면 애가 조금이라도 다치거나 나쁜 친구와 어울리는 걸 원하지 않기 때문에 애를 아예 집 밖으로도 못 나가게 하는 과보호 엄마가 생각난다. 뭐, 엄마가 귀한 자식 좀 과보호 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라고 나도 생각은 하지만 그 자식이 내일모레 환갑이라면 문제가 있는 것 아닐까나(그럼 엄마는 최소한 여든 다섯은 되어야 되겠구만…)? 뭐 나는 소위 말하는 ‘파워 유저’도 무슨 컴퓨터 귀신도 아니지만 내 컴퓨터 어떻게 유지관리해야 되는지 정도는 알고 있는데 대체 나도 걱정 안 하는 걸 알아서 걱정해주는 마이크로소프트 어린이들의 소심함은 대체… 왜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인지 대충 알 것도 같다. 오늘도 비스타 잘 안 돌아갈까봐, 아니면 멀쩡한 컴퓨터에 바이러스 옮길까봐 노심초사하느라 그런거 아냐… 다 지들이 초래한 재앙인걸.
# by bluexmas | 2008/05/13 12:11 | Life | 트랙백 | 덧글(4)
ps:전화했었니? 부재중 전화에 00000-000이 짝혀있더라구…
저는 집과 사무실이 5분 거리였던지라 사무실을 PC방처럼 이용한 바, 집에 인터넷을 안깔았더니 회사 관두고 갈데가 없어서 하루는 PC방 하루는 도서관 이런 식으로 메뚜기 생활을 하고 있습죠. 이 상황을 타개할라니 당장 담주 출근이고.. 퇴근 후 몇 시간이나 인터넷하겠어란 안일한 생각으로 피하는 중이랍니다.
이제 그럼 이별을 정리하며 새로운 만남을 슬슬 준비하셔야 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