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점심

선배가 지난주엔가, 컵라면으로 점심을 먹자고 제안했다. 회사 앞 공원으로 접어드는 길 모퉁이에 있는 가게에서 우리나라 사발면을 파는 걸 보았다면서, 밥과 김치를 싸와서는 거기에서 라면을 사서 공원에서 먹자고. 사실 나는 요즘 라면을 거의 안 먹는데다가 회사 500미터 반경에 김치를 가져온다는 발상이 그리 내키지는 않았지만 뭐 까짓거, 라면 같이 한 번 못 먹어주나 싶어서 그러자고 답을 했다. 그리고 월마트에서 파는 99센트짜리 김치 사발면을 사서 준비했다. 때마침 깍두기도 너무 맛있게 잘 익어서 라면이랑 같이 먹기에는 딱 좋은 상태이기도 했다.

내가 가스불을 처음으로 켜고 뭔가를 만든 건 아홉살 때, 바로 라면을 끓여먹기 위해서였다. 지금 이렇게 혼자 살면서도 병적으로 밥을 해 먹는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사실 어머니는 일 때문에 집을 비우면서도 늘 밥과 반찬을 차려놓고, 쪽지까지 남겨놓고 나가시곤 했으니 먹을게 없어서 라면을 먹어야 될 상황은 단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었다. 사실은 부모님이 라면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으시기까지 했으니, 라면은 사실 별식이었다, 1주일에 한 번, 토요일 점심에. 공무원이셨던 아버지는 두세시쯤 퇴근하셨고 어머니의 학원은 그보다 조금 더 늦게 끝났으니 나는 오전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상가에 있는 어머니의 학원에 가방을 놓고 수퍼마켓에서 매주 다른 종류의 라면을 사다가 끓여먹고 나름의 방법으로 토요일 오후를 즐겼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엔 목욕을 하고 가족들이 다 같이 저녁을 먹는 것으로 하루가 마무리되곤 했다.

그래서 기억을 더듬어보면 안 먹어본 라면이 없는 것 같다. 한때 제일 좋아했던 라면은 삼양의 장수면이나 농심의 브이라면, 뭐 이런 것 같은데 너무 오래되어서 좀 가물가물하다. 어쨌든 그렇게 라면을 내 손으로 끓여먹어서 라면이라면 기가 막히게 끓여주던 시기도 있었는데 요즘은 너무 안 끓여먹어서 감을 잃었는지 거의 100% 뭔가 모자란 맛으로 끓인다.

점심 시간이 되어서 M선배와 나는 각각의 라면에 물을 붓고 내 도시락 가방에 담아서는 회사 앞 미술관의 벤치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를 내려서는 가방을 선배에게 주고 나는 주차장에 가서 차에 놓아두었던 김치를 꺼내왔다. 라면이랑 같이 먹기 딱 좋은 상태로 익었으니 밀폐용기에 담아서는 비닐을 두 겹으로 쌌는데도 냄새가 흘러나온다. 다행스럽게도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우리는 그래도 안심할 수 없어서 뚜껑을 덮어놓고는 깍두기를 하나씩 꺼내 먹을때마다 뚜껑을 열었다가 또 닫았다가를 반복했다. 날씨는 아틀란타의 가을이 그래왔듯이 아무것도 더 바랄 필요 없는 최고의 날씨였고 약간 불은 김치사발면에 찬밥, 그리고 아주 잘 익은 깍두기는 그 분위기에 그럭저럭 잘 묻어났다. 그와 나는 아주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점심을 먹고는 같이 앉아 담배를 한 대씩 피웠다. 흐뭇했다.

 by bluexmas | 2008/09/26 12:48 | Life | 트랙백 | 덧글(6)

 Commented by Amelie at 2008/09/26 13:18 

날씨랑 글이랑 잘 어울려요.

요즘 한국 날씨는 너무 좋아서 무엇을 하든 기분이 좋아요~!

깍두기 어떤 맛일까 궁금하네요 ㅎ

 Commented by veryStevie at 2008/09/26 13:59 

저희 주식은 요즘 찬우유와 콘플레이크,, ㅠ.ㅠ 춥네요.. 라면 먹고싶다

 Commented at 2008/09/26 14:4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모조 at 2008/09/26 15:58  

분위기는 딱 서울같으네요 ^^

 Commented by basic at 2008/09/27 02:59 

오.완전 만족스러웠을 것 같아요. 제 도시락도 오늘은 튀김우동 사발면인데 김치는 안 싸가요. 왜 도대체 우리가 김치 먹는데 이렇게 눈치를 봐야 하는 걸까요. 이 땅덩이도 큰 north america (canad 포함)는 멀티 컬쳐라면서요. (요즘 맨날 이렇게 삐뚤음;)

 Commented by bluexmas at 2008/09/27 13:20 

Amelie님: 요즘 우리나라 날씨 많이 쌀쌀해졌다고 그러더라구요. 여기도 날씨가 너무 좋아서 길가다 아무런 이유없이 얻어맞아도 기분이 좋을것 같아요~!

참, 깍두기는 깍두기 맛이에요^^ 김치 맛 안나는 김치를 너무 많이 만들어봐서 김치가 김치맛 나면 행복하더라구요-_-;;;

스티비님: 그럼 우유라도 좀 데워서 드시지 그러세요… 저도 아침에 시간이 없어서 늘 빵이나 찬 우유 이런 것만 먹어서 차가운 아침 먹는 기분 너무 잘 알아요. 혼자 사는 살림 내시면 전자렌지라도 꼭 두고 뭐라도 뜨거운 국물을 드세요. 저도 이번 주 내내 끓은 국이 없어서 마른 밥을 먹었더니 마음이 메마른듯한 느낌이…

비공개님: 뭔가 가난하지만 행복한 달동네 가족의 드라마 장면 같지 않아요? ‘동생아, 형이 오늘은 일당 좀 더 받아서 계란이랑 돼지고기 사왔어. 계란집 아줌마가 부모님도 없이 둘이 열심히 사는게 갸륵하다고 깨져서 못 파는 계란도 반 판이나 덤으로 주셨으니까 얼른 쌀밥 지어서 실컷 먹자.’ 이런 거 있잖아요. 70,80년대에 밥 먹고 사는 것만으로 감지덕지하라고 군사정권이 소년중앙 같은데 연재해댔던 억지 소설 뭐 이런거요. ‘외무지개 뜨는 언덕’ 이랄지…^^

모조님: 그렇죠? 하지만 서울이라면 사람이 주변에 너무 많아서 김치 다 빼았겼을 듯… 이번 깍두기가 완전 성공이었거든요. 다른 때 담그는 양의 두 배를 담궜는데도 벌써 다 먹었어요. 이번 주말에 김치 담글 시간 없는데 T_T

basic님: 아무래도 김치는 너무 냄새가 강해서 좀 그렇더라구요. 멀티 컬쳐는 뭐 지들 편한대로 다 망가뜨려놓고 쪽팔리니까 그렇게 붙여대는거죠. 젓갈 안 넣은 야채무침 발로 무쳐놓고서는 김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