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늘

오늘

적당히 출근했지만 애초에 일할 생각도 없었고, 또 일도 없었다. 책상을 치웠어야 하는데 귀찮아서 월요일로 미루고, 잡다한 몇 가지를 정리한 다음 시간을 때우다가 점심을 먹고 또 시간을 때우다가 갑자기 CD가 사고 싶어져 근처 서점에 갔다왔다. 지지난주에 위저 콘서트에서 오프닝 밴드였던 Angels & Airwaves가 생각보다도 훨씬 좋았기 때문에 두 번째 앨범을 듣고 싶어졌다. 물론, 첫 번째 앨범은 처음 나왔을때부터 가지고 있었다. 운전하다 말고 라디오에서 노래가 나왔는데 너무 좋아서 차를 돌려서 씨디를 사러 갔던 기억이 난다.

점심시간이 끝나고는 스물에서 서른 명 사이의 팀 멤버들이 모여서 간단한 회식자리를 가졌다. 이번 마감을 넘긴 것도 넘긴 것이지만 그동안 다른 회사에서 빌려왔던 애들이 오늘로써 마지막이기 때문에 겸사겸사 간단한 술자리를 가진 것이다. 예약이랑 이런 것들을 내가 주관해서 어제 저녁에 회사 근처 식당에 전화해서 자리 예약하고 사람들 데려가고…물론 돈은 윗 사람들이 냈다. 애들끼리는 저녁을 먹는다고 오라고 했지만 무엇보다 영어쓰기 피곤해서 적당히 둘러대고 세시 반에 퇴근했다. 어차피 일도 없으니 일찍 퇴근해서 적당히 장을 보고 집 앞 공원에서 달리기를 할 생각이었다. 흐리고 비가 조금씩 흩뿌리는 날씨여서 조금 불안했지만 달리기를 끝낼때가 되서야 비는 달리기에 불편할 정도로 내리기 시작했으니, 운이 좋았다.

어제

어째 때가 되었는데도 생각이 없었던건지… 점심시간이 가까워져 오는데 M선배가 부르더니 승진을 했단다. 우리 회사는 늘 이맘때에 승진을 시키는데, 아침에 대상자들을 살짝 불러내서 사장님 방으로 보이게 한 다음 알려주고, 오후에 사원 전체 모임을 해서 이름도 부르고 뭐 싸구려나마 샴페인도 한 잔씩 마시는, 뭐 그런 자리를 가지곤한다.

나는 M선배가 올해 승진할거라고 진작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미국 합쳐서 경력이 10년이니까. 문제는 신입사원도 안 받는데 계속해서 승진을 시키는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게 내 생각이었는데, 뭐 그거야 어떻게 보면 내가 걱정할 필요도 없는 상황일지도. 그리고서는 승진한 사람들 이름을 읊어주는데…으음.

어쨌든 M선배, 처음엔 인사치레인 듯 자기 혼자 승진해서 미안-뭐 그게 말이 되나, 난 이제 4년차에 접어들고 있는데-하다더니 곧 말을 바꿔서는 언제나 나에게 했던 얘기, 그러니까 회사에서 일을 하려면 조금 더 일에 깊이 관여해야 되는게 아니냐, 를 꺼내기 시작한다.

여기서부터 얘기가 조금 꼬이기 시작하는데, 일단 기본적인 상황부터 얘기하자면, 난 승진에 대한 기대가 거의 없다. 3년차를 넘겼으니 첫 번째 승진의 대상이기는 하지만, 모든 상황이 잘 맞아 돌아가봐야 내년에나 가능할까 말까, 하다는게 현재 회사에서의 내 상황을 객관적으로 쪼개보고 나서 내린 나의 결론이다. 불과 올해초까지만 해도 나의 직장생활은 여러모로 구석에 박혀서 낭비되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또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조차도 몰랐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책임의 범위를 확장시키는 것 자체를 원하지 않았다. 이제 거기에서 벗어난지 1년도 채 안 되었고 나는 또 새로운 사람들과 일하고 있지만 여기에서도 벌써 사람들의 역할이 99% 정해져있는터라 내가 뭘 해 왔는지, 또 뭘 더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게 쉽지많은 않은 상황이다. 그러니까 지금의 이 상황은 큰 회사에서 벌어지는 아주 전형적인 것, 나도 잘 알고 있다. 어쨌든 올해 나에겐 승진에 대한 기대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M선배의 혼자 승진해서 미안, 이라는 얘기를 곧이곧대로 듣지도 않았다.

바로 옆 팀에서 일을 하는 M선배는 일을 하고 있으면 가끔 와서 이런저런 것들을 물어보곤 하는데 그건 대부분 자기가 몰라서 물어보는게 아니라 내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알기 위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해왔다. 그리고 나는 그 대부분의 경우에 그냥 모른다고 대답을한다. 그건 말이 길어지는게 귀찮아서 일수도 있고, 그 의도를 알고 있느니만큼 그 의도대로 흘러가고 싶지 않는 나의 다소 비뚤어진 의도때문일 수도 있다. 논쟁은 하지 않는다. 하고 싶은 생각이 없으니까. 일에 대한 생각은 나 혼자만 하고 싶고 굳이 일에 관련된 사람이 아니면 얘기하고 싶지 않다. 그것이 나의 생각이다. 하지만 나의 그런 행동이 M선배로 하여금 내가 일에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게 만들 것이다. 적어도 내가 짐작하기로는.

나는 이런 나의 생각 자체가 회사나 조직과는 맞지 않는다고 늘 생각해왔다. 따지고 보면 내가 조직에 맞을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고, 따라서 회사에 다닐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직장인으로써 목표가 동기 따위가 없냐면, 그런건 절대 아니다. 삶 자체에 목적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난데 어떻게 그 부분부분에 목적이 없을 수 있을까. 그러나 단 한 번도 나의 목표를 회사에서 승진해서 부장되고 사장되는, 뭐 그런 것으로 삼아본 적이 없다. 아예 나라는 사람 자체를 그런 자리에 앉혀놓은 걸 상상해 본 적이 없다고나 할까?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승진, 해야된다. 하지만 그건 정말 승진이라는 걸 하고 싶어서라기 보다는, 그게 내가 회사 안에서 제대로 기능하고 있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이 회사를 통해 이루고 싶은 목표-사람들에게 거의 말하지 않지만-라는게 있고, 그 목표를 이루려면 나라는 사람이 그 안에서 제대로 기능해야되며, 그렇게 제대로 기능하고 있다는 반증이 바로 월급이며 승진, 뭐 그런 것이다. 나는 피드백을 원한다, 그래야 내가 무엇인가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 아니까.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바로 내가 얻을 수 있는 피드백인 것이다.

어쨌든 나는 M선배의 말에 잠깐 동요해서 몇 마디 말을 덧붙였지만 자리로 돌아오고 나서야 그게 무의미했다는 사실을 언제나처럼 깨닫게 되었다. 그건 선배의 충고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건 절대 아니다. 나에겐 그 충고대로 따라서 삶을 살 수 없는 이유들이 있다. 그 이유들이 정당한 것인지 아닌지, 사실 나는 알 길이 없다. 꼭 그래야만 되는지 아닌지도 나는 모른다. 그냥 이건 나의 삶이고 나는 이 삶에서 너무나도 분명하게 원하는 것이 몇 가지 있다. 그건 돈도 명예도 아니다. 그리고 그건 회사를 통해서 이뤄지지도, 이룰 수도 없는 것이다.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내 이 회사라는 곳 안에서 나 스스로도 또 주변의 사람들도 제대로 기능하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한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내가 언제나 생각하고 있는 삶에 대한 생각, 그리고 그것을 이루고 싶은 크고 작은, 그리고 수많은 방법들, 그 모든 것들이 하나도 맞지 않는 것일수도 있다. 어쩌면 나는 능력도 그다지 뛰어나지 않은, 중산층 부모밑에서 자란 사람으로써 그냥 회사 열심히 다니고 월급 받고 살아야 되는 사람인데 자꾸만 다른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그 모든 것이 맞고 내가 틀렸다고 해도 나는 여기에서 다른 길로 가고 싶은 생각이 없다. 살면서 많은 후회를 겪어봤지만 지금 여기에서 내가 원하고 있는 그것들 자체에 대한 후회는 전혀 없다. 어느 순간 내 스스로 선택한 것들에 대해서 후회나 변명 따위는 하는게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지금 생각하고 있는 그 많은 것들이 현실로 이뤄지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 세 시에 모임이 있다는 전체 메일을 받고서, 나는 일을 하다가 십 분 전에 사무실을 빠져 나왔다. 작년에는 그랬다. 저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래서 승진하는게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냥 순수한 마음으로 축하해줘야지, 내가 마음을 좀 더 넓게 가져야지,라고. 그러나 누군가의 얘기를 듣고 나서 올해도 내가 그 자리에서 그렇게 하고 있다면 그건 가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태어나도 절대 닮으려 하지 않을테다, 라고 이를 악 물어가며 나 자신으로 하여금 다짐하게 만드는 사람들의 삶을 보았다. 승진이든 뭐든 안 해도 좋으니까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거부하고 싶다. 그래서 사람들이 축배를 드는 동안 나는 건너편 미술관 벤치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솜사탕에 대한 낙서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누군가 내가 여기에서 이렇게 하고 있다는 걸 본다면 시기와 질투 때문으로 생각할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Suit Yourself^^

 by bluexmas | 2008/11/08 13:21 | Life | 트랙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