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생신케잌(3)-백만 개 눈 외계인
앞의 글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별 것 없었던 처음 계획은 그냥 생크림을 올려서 덮고 제철 과일 같은 걸 얹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단 비싼 생크림을 사기가 싫었고, 딸기가 들어간 상황에서 마땅한 제철과일마저 생각나지 않았다. 어쨌든 별 뾰족한 수가 없었는데, 뭘 봐서 그런 것이었는지, 리치몬드 상가를 들렀다가 오는 버스 안에서 알 수 없는 패턴이 생각났다. 아마도 좋아하는 넥타이와 비슷한 패턴이었던 것 같은데, 크고 작은 동그라미가 규칙 없이 반복되는, 뭐 그런 것이었다. 뭐 그럼 버터크림을 바르고 이런 패턴을 가루 설탕으로 내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만으로는 좀 밋밋할테니까, 그리고 초콜렛에 체리가 잘 어울리니까 마라스치노 체리를 얹어주기로 했다. 조악한 스케치를 했다.
한 번도 해 본 적은 없지만, 저런 무늬를 케잌에 내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다. 종이나 금속으로 패턴을 떠서, 그 위로 가루 설탕, 코코아 가루 등등의 고운 가루를 체로 내리면서 뿌려주면 되니까. 게다가 캐드를 다룰 줄 아니까 저런 패턴은 발가락으로 마우스를 쥐고 만들 수 있다. 결국 1분 만에 캐드로 패턴을 그려 뽑은 뒤, 홍대 앞 호미화방에 들른 길에 사왔던 두꺼운 도화지를 붙여 칼로 쓱싹쓱싹 오려냈다. 원이라서 조심스럽게 파냈더니 무려 5분이나 걸렸다. 사진은 완성된 판.
그리하여 버터크림을 바른 케잌에, 일단 오븐에 살짝 구워 부순 피칸을 둘러주었다. 아몬드도 나쁘지는 않지만, 케잌의 식감이 기본적으로 부드러운 만큼, 호두나 피칸이 훨씬 낫다. 그리고 속껍질이 붙어 있는 경우 호두보다 피칸의 쓴맛이 훨씬 덜하기 때문에 구할 수 있다면 피칸을 쓰는 편이 낫다. 판때기를 돌려가며 열심히 피칸을 붙인다. 적당히 붙었다 싶으면 다시 깨끗하게 털어낸다.
피칸 붙이기가 끝나면 흰 색이 도드라져 보이게 바탕으로 코코아가루를 뿌려준다. 버터크림을 발라놓았으니 가루는 잘 붙는다. 그리고 그 위에 만들어둔 판을 대고 가루 설탕을 뿌려준다. 그래서 나온 케잌은 조금 밋밋하지만 왠지 모던하다고 우겨도 다들 고개를 끄덕끄덕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문제의 시작은 거기서부터…
저렇게 장식을 끝내기에는 너무 밋밋한 것 같아 마라스치노 체리를 얹을 생각이었는데, 문제는 크게 그린 원의 가운데에만 몇 개를 올렸어야 할 것을, 아무 생각 없이 모든 원에다가 얹어버렸다. 게다가 아끼지 말고 짤주머니에 체리를 고정시킬 크림을 담아서 짜줘야 할 것을, 귀찮아서 대강 샌드위치 담는 비닐에다가 넣어 짰더니 체리 밑의 크림이 너무 지저분해 보였다. 뭐 별 수 있냐, 아마추어인 것을. 만들어 놓고 보니 케잌이 꼭 눈 백만 개 달린 외계인처럼 보였다…
그래도 사온 상자에 케잌을 담으니 케잌이 정말 케잌 같아 보이기는 했다. 조심스레 냉장고에 넣어 몇 시간을 굳혔다가 그날 저녁, 본가에 들고 갔다.
나중에 단면을 잘라보니, 역시 아마추어라서 크림의 두께며 케잌이며 모두 균일하지가 않았다. 그러나 맛은 뭐, 괜찮았다. 버터크림을 잘 못 만들어서 그런지 냉장고에서 퍼지처럼 굳어 케잌의 식감과 너무 대조되기는 했지만, 맛 자체는 나쁘지 않았고 시럽을 듬뿍 머금은 제누와즈도 그만하면 합격. 중국산이라서 먹기 무섭기는 했지만 체리도 나름 초콜렛맛을 띈 케잌과 잘 어울렸다. 이래저래 3일에 걸쳐 만든 아마추어 노동력 집약형 케잌은 좀 힘들기는 했지만,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 by bluexmas | 2009/07/10 10:05 | Taste | 트랙백 | 덧글(28)
버터크림과 초코케익의 조화 ㅠㅠ 먹음직스럽네요~
엄청 먹음직스러워 보이고, 진짜 이쁜데요.
버터크림의 농후하고 크리미한 단맛을 아침부터 꿈꾸게 하시다니… ㅠ_ㅠ
그럼 된거죠 😀
너무 맛있어 보여요. 먹구 싶오~ ㅠ_ㅜ
백만 외계인눈에서는 풉-하고 웃긴했지만 …아 디자인 귀엽습니다. ㅋ 버터크림케이크 먹어본지 오래되서 맛이 가물하지만 이건 맛있겠다~~싶은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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