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타래에 관한 1번 비유와 인터뷰 후기
대부분의 건물 지하 주차장에 들어갈 때는 지저세계 탐사대라도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한다. 헤드라이트를 켜고, 아주 꼬불꼬불한 램프를 조심스레 내려간다. 헤드라이트의 빛에 법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급하게 꺾어지는 나선의 경사면이 꼭 드릴로 땅을 판다면 나타날 것 같은 분위기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차를 살 때 전 차종에 드릴은 옵션이 아니었다고, 아버지는 건조하게 대답해주셨다.
얼마나 길게 나올지는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적어도 머리는 정리하고 가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해서 넉넉하게 집을 나섰는데 고속도로는 막혔고 오리역까지 1시간 20분이나 걸렸다. 차를 몰아 나오는 길에는 사고가 날 뻔도 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시간이 넉넉하게 남아서,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혼자 예상 문제를 뽑고 답을 구하는, 북치고 장구치는 시간을 가졌다. 팔이 두 짝이라 얼마나 다행인 것인지.
오늘 오후, MBC DMB의 책 소개 프로그램 <내 손 안의 책(띄어쓰기 헛갈린다… ‘손 안’이 맞다고 생각하는데 ‘손안’인가?)>을 위한 인터뷰를 했다. 섭외전화를 받은 건 지난 주 어느 날 마감 때문에 밤을 새운 다음 자던 아침인가 그랬을 거다.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어제는 요즘 많이 만든 레몬 머핀을 구웠다.
딱히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나는 언제나 의식하다가 모든 걸 망쳐왔기 때문이다. 수능도 의식해서 망쳤고, GRE도 그런 적 있다. 많은 것이 찰나에 결정되는 것들의 대부분을 나는 꾸준히 의식하면서 망쳐왔다. 그래서 카메라 앞에서 인터뷰를 한다는 생각보다 누군가를 만나서 내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암시를 주었다. 카메라는 있지만 없는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아 나 머리 큰데 카메라를 거치면 얼마나 더 크게 나올까?’ 라든가 ‘배를 가리려면 무슨 옷을 입어야만 할까?’와 같은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인터뷰 직전 질문지를 받아들자, 실타래에 대한 비유가 생각났다. 나는 실타래에 관한 비유 두 가지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처음에 몇 가닥을 잘 풀면 그 뒤로는 술술 풀려나온다’는 것이다. 이 비유에 대해 처음 생각한 건, 아마도 블로그에 썼다고 생각하는데, 대학원 1학기 때의 건축이론 수업 발표였을 것이다. 모든 것을 철저하게 준비해갔지만, 나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처음 몇 가닥을 푸는데 실패했다. 사람들 눈을 쳐다보니 손가락이 굳어버려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다고나 할까? 그 뒤로도 그렇게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걸 망쳐본 적은 없었다…. 지난 번 교보 <키움>에서 행사를 할 때까지는. 지난 번에 뭉뚱그려서 언급하고 말았지만, 나의 계획은 책을 낭독하는 것이었다. 무슨 영화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데, 거기에서 레이철 바이스의 상대역인, 나이 많이 먹은 작가가 낭독-reading-을 하는 장면이 나왔었다. 제목을 찾아보기 귀찮은데, 라이언 레이놀즈와 아일라 피셔가 돌고 돌아 서로가 짝임을 확인한다는 뭐 그런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Definitely Maybe>였던가?). 하여간 뭐 그런 걸 하고 싶었다. 그러나 여기에 쓰고 싶지 않은 어떤 이유에서 나는 그때 아주 오랜만에 실타래를 푸는데 실패했다. 아쉬웠다. 이 기회가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오늘, 나보다 발음도 목소리도 백만배는 더 좋은 사람이 내가 쓴 문장 읽는 것을 듣고 위안을 얻었다. 물론 나에게도 다음 기회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은 여전하다. 어쨌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 비유를 써서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은 물음이 있었다.
의식하지 않는 노력의 궁극적인 목적은 NG를 내지 않는 것이었다. 물론 카메라 앞에 서 보는 것이 이번이 처음… NG가 난다고 해도 용서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겠지만, 솔직히 못할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정도는 하고 싶었다. ‘아 머리가 커서 배가 나와서 우스꽝스럽게 보일지도 몰라’의 걱정만 하지 않으면 되는 상황이었다. 먼 옛날, 나를 사달라고 회사마다 인터뷰를 하고 돌아다니던 시절, 단어 하나하나를 생각해서 내뱉지 않더라도 잘 되는 상황이라면 모든 말들이 원래 그 상황에서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건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내 안에 있는 난장이들이 나 대신 모든 상황에 맞는 단어를 말하도록 단추를 누르고, 레버를 움직이고, 핸들을 돌리는 뭐 그런 식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말해놓고 나니 더 정확한지는 잘 모르겠다-_-;;; 더 추상적이거나 뜬금없는 것 같은데 오히려-_-;;;). 그래서 난쟁이들은 오늘 수고가 아주 많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왠지 진이 빠지는 느낌이었는데, 이러한 기분으로 운전을 하면 안 될 것도 같고 차도 좀 빠져야 하므로 근처에서 밥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는 모처에 들러 서로 다른 콩으로 내렸다는 에스프레소를 축배 삼아 더블샷으로 두 잔 마시고서 평소 내 걸음보다 조금 촘촘하다는 느낌으로 걸어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또 하나의 새로운 일에 대한 기록이, 지금 이루어졌다. 방송은 2주일 뒤쯤이라고 들었다. 편집이 어떻게 될지는…물론 모른다.
참, 실타래에 관한 또 다른 비유 하나는, 오랫동안 잊고 있다가 이런 상황 속에서 다시 기억이 났는데, 꼭 쓸데를 위해 블로그에는 쓰지 않을 것 같다. 그걸 꼭 쓸 일이 생겼으면 좋겠는데…
# by bluexmas | 2010/08/17 02:00 | Life | 트랙백 | 덧글(6)


2. ‘의식하면 망친다’라는 가설은 실제로 과학적으로 증명되고 있는 듯 해요 ㅎㅎ 해결책은 뭐냐고 누가 그들에게 물었는데 ‘끝없는 연습’이라고 답하셨다고들…
3. homunculus가 떠오르네요 ㅎㅎ
4. 다음에는 꼭 낭독하실 수 있으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