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기억 속의 피에르 가니에르
귀찮아서 글로 남겨두지 않았더니 기억이 날아가버리는 경험들이 있다. 6월 말, 아무개님 덕분에 참석했던 피에르 가니에르 서울의 포도주 시음행사가 그 좋은 예이다. 인상적이지 않은 부분이 있어서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아마 좋다고 술을 많이 퍼마셔서 맛이 간 덕분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인사불성이었던 가운데 꼭 생각나는 부분만 정리하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워낙 어두워서 사진도 별로 볼 건 없다.
아뮤즈 부시. 거의 기억나는 게 없고, 웨이터의 “간혹 팔각을 드시는 분도 있습니다”라는 대사만 기억난다.
코스의 시작은 키조개 속을 채운 카네로니와 어란을 얹은 토스트. 같이 나온 포도주가 인상적이었는데, 가볍고 좁고 드라이하지만 풀냄새도 안 나고 신맛도 나지 않는, 그야말로 내가 ‘이런 것이 있기는 있을까’라고 생각하던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시작부터 달리기 시작했다.
빵은… 우리나라 어느 식당에서 먹은 것보다도 나았던 듯. 눈으로 봐도 그렇겠지만 겉은 탄 듯 구수하고 속은 부드러운, 그런 빵이었다.
대게 살 크림과 패션푸르트 소스, 오징어 볶음과 아보카도라는데, 역시 기억나지 않는다-_-
이때부터 마신 포도주의 병 사진을 찍었던 듯.
전복과 파슬리 버터, 비트 쿨리와 감자. 버터는 그렇다고 쳐도 으깬 감자가 전복의 식감만 남겨놓고 모두 앗아가는, 그런 느낌이었다. 재료가 좋으니 맛이 없지는 않아도 컨셉트가 마음에 들지 않으니 성공적인 요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같이 마신 론은 어느 시점에서 정말 ‘뚝!’하고 떨어지듯 그 여운이 사라져버리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하얀 후추를 뿌려 구운 오리 가슴살에 청경채와 체리, 그리고 비가라드 오렌지 소스. ‘비가라드(bigarade)’가 뭔가 찾아보니 결국 쓴맛 나는 오렌지, 또는 그 오렌지로 만든 소스라니까 거의 오리 소스를 곁들인 오리(Duck l’Orange)인 셈? 여기서부터는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같이 마셨던 술은 키앙티.
마지막으로 나온 건 브루고뉴 식으로 조리한 달팽이라는데… 맛은 기억나지 않고 재료들의 식감만 생각난다. 달팽이는 다소 쫄깃거렸고(당연한 거 아닌가?), 크레송은 아삭거리고… 너무 뻔한 이야기인 듯-_-
디저트 또한 별 기억은 없으나, 두 번째 디저트 맨 왼쪽에 있는 건 와사비가 들었는데 달지도 짜지도 않은, 디저트라기에는 다소 밍밍한 맛의 음료여서 인상에 남았다. 먹고 셰프들이 인사하러 다녔는데, 술에 취해서 개주접을 떨었다.
이렇게 별 기억이 나지 않는 가운데, 지금까지 계속해서 가지고 있는 의문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과연 피에르 가니에르가 여기에 레스토랑을 열었을때 염두에 두었던 ‘비전’이 바로 이런 것이었을까?” 음식이 맛이 없었거나 웨이팅이 별로였거나 그랬다는 의미가 아니다. 가격(12만원)을 생각한다면, 모든 것을 포함했을때 경험의 질은 나쁘지 않은 수준이었다. 굳이 영단어를 들먹이자면 ‘good but not great’라고나 할까? 하지만 딱 꼬집어 낼 수는 없지만 뭔가 어색하거나 겉도는 듯한 그런 느낌이 있었다. 그게 정확하게 무엇인지도 모르니 왜 그런지도 말하기는 좀 어렵다. 하지만 단 한 번을 갔다고 해도 피에르 가니에르의 이름을 달았는데 그 감상이 ‘good but not great’였다면…
# by bluexmas | 2010/10/20 09:19 | Taste | 트랙백 | 덧글(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