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오며 했던 생각들
지금 잠에서 깨었어요. 시간은 밤 열 한시 오 분…배가 고프네요.
12월 30일 저녁, 일곱시가 조금 못 되어 버스 정류장에서 손을 흔드는 것으로 여행의 공식일정은 마무리 지어졌지만, 집에 돌아와서도 책상정리(이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글을 쓸지 모르겠네요), 엄청나게 불어나서 다시 그동안의 떠돌이 생활로 갈고 닦여진 기술을 발휘해야만 했던 짐싸기(모든 걸 다 넣고 두 트렁크가 똑같이 제한 중량에 딱 맞춰졌다고…), 그리고 크리스마스 카드로 인사할 시기를 놓쳐버린 사람들에게 보내기 위한 연하장쓰기를 해야 되었기 때문에 결국 저는 새벽 세 시가 넘어서야 잠들 수 있었습니다. 비행기는 아침 열 시…그러니까 한 두 시간 정도 자고 일어나서 길을 떠나야 했죠, 뭐 언제나 그래왔지만.
그래서 정말 어찌나 피곤하던지, 이번엔 뒷자리에 학교도 들어가기 이전 나이의 어린 아이들이 셋이나 뒷줄에 앉아서 열심히 발길질을 해댔음에도 불구하고 비행기가 미국 대륙에 들어설 때까지 편하게 잘 수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옆자리가 비었던 것도 한 몫했던 것 같구요(말일이라 그런지 은근히 빈자리가 많더라구요). 그렇게 편하게 자고 일어나서는 장보기를 위한 목록을 열심히 작성했죠. 어차피 집 냉장고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으니까, 생각하기가 어찌나 편하던지…
하여간, 집으로 돌아오는 여정이 그저 열 세 시간 반의 비행으로만 마무리지어진다면 몸도 마음도 참 편할텐데, 언제나 그럴 수는 없죠. 집은 소중한 곳이니까 그 소중함을 뼈저리게 일깨워 주기 위해서라도 그곳으로 돌아오는 길은 멀고도 험난해야 하는걸요. 그리하여 저는,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 심사장(그래도 착취 비자를 보고는 아무 말도 안 하고 ‘welcome back’ 이라고 말해주는 아량까지! 해서 저의 착취가 이만큼의 보람은 있구나, 라는 생각에 심사를 마치고는 잠시 눈물을…T_T)을 거쳐, 나온 짐을 일단 찾아 다시 공항으로 부치고(여기 시스템이 아주 이상해요. 짐을 일단 찾고 또 다시 부치죠, 아틀란타가 종착지인 사람, 또 비행기 바꿔 타고 다른 동네로 가는 사람…이렇게요), 세관과 보안검사를 거쳐 지하철을 타면 일단 입국장으로는 나올 수 있어요. 물론 입국장엔 아무도 기다리고 있지 않죠. 그거 뭐 하루 이틀 일도 아니니 일단 그냥 통과… 기다리면 나오는 합계 50kg의 트렁크를 양 손에 하나씩 끌고 나머지 가방 둘을 손에 쥐고, 잠시 고민하다가 지하철을 탔어요(짐이 많아서 택시라도 탈까 했죠). 그렇게 지하철을 타면 30분 걸려 회사에 도착, 트렁크를 힘겹게 끌고 역 바로 길 건너의 회사 주차장에 이르면 마지막 난관이 기다리고 있는거죠. 제 차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그래서 트렁크를 끌고 경사진 주차건물을 7층부터 오르기 시작했죠. 다행히 10층에 있더라구요. 그래서 트렁크를 싣고 시동을 걸고 출발… 아, 저를 반겨 주고 싶어서 그런건지, 오늘도 아틀란타는 너무 따뜻하더라구요. 하여간 연말인데 샴페인이라도 한 잔 마셔줘야 된다는 생각에 일단 술가게에 들러 적당한 샴페인을 사고, 다시 차를 몰아 사람이 복작거리는 베트남 쌀국수 집에 들러 점심을 먹고, 두 군데에 들러 장을 보고서야 저는 집에 돌아올 수 있었어요. 그러니까 비행을 제외하고도 이렇게 기나긴 여정을 거쳐서… 짐은 물론 사온 반찬거리들을 다 냉장고에 넣고서야 잠이 들 수 있었죠. 아, 정말 피곤하던데요. 그리고는 열 한시가 되어서야 깰 수 있었던거에요. 이제서야 밥을 안치고 국을 끓이고 칼질을 시작하니 그동안 썰렁했던 이 집이 다시 사람 사는 공간과 같은 느낌을 주기 시작하네요. 도마위에 마늘을 올려놓고 다지는 동안 새해가 밝았어요, 허무하게도… 나중에 누군가 얘기해줄 사람이 생기면 그렇게 말해줘야 되는 걸까요? ‘사실, 저의 2008년은 마늘을 다지면서 찾아왔어요…’ 라고? 아무래도 귓속말이 필요하겠네요. 좀 민망한 얘기잖아요. 샴페인 마시면서 카운트다운 하려고 했는데 마늘을 열심히 다지다가 그 순간을 놓쳤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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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저에게 물어봤어요. 비행기를 타고 왔던 그 기나긴 시간 동안 무슨 생각을 했냐고… 궁금하세요?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 쓰고 남은 푼돈을 바꿔서 올까… 생각하다가 공항 책 판매대에 들러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책을 집어들었어요. 알고보니 피천득의 ‘인연’ 이더라구요. 사실 제 책 읽기의 바탕은 서양이나 우리나라를 통틀어 고전들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읽은 기억이 없었어요. 그래서 낼름 집었죠. 여담이지만 이런 책과 정이현의 산문집들(그것도 두 권이나!) 따위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건 정말 앞뒤가 맞지 않는 농담과 같더라구요. 어쨌거나, 오는 동안 읽었냐구요? 아뇨…그냥 잤다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자는 동안 계속해서 생각했어요. 꿈을 꾸듯 생각을 했던건지, 아니면 생각을 하는 꿈을 꾸었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책의 제목 때문이었는지 어쨌는지 계속해서 인연에 대한 생각을 했어요.
사실, 저는 한 번도 인연이라는 걸 부정해본 적은 없던 것 같아요. 단지 실수로 몇 번 정도 그 단어를 남발하고 실패를 겪고 나면 인연 자체보다 그 인연이라는 걸 믿는 자신을 부정하기 시작하는게 문제였던 거죠. 그러나 그게 세상에 없는 개념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언제나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때가 되면, 아니 인연이라는 걸 만나면 그걸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마치 홍보대사처럼 전파해주고 싶었는데, 기회를 잡은 적은 없었죠.
…아이팟 셔플의 전지가 다 닳아 없어질 그 때까지, 저의 귀에는 누군가가 아주 오랜 동안 갈고 다듬었던 리듬과 멜로디가 흐르고 있었어요. 아주 오랜만에 누군가의 ‘마음의 몸’ 이 들려주는 음악… 누군가 이게 바로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인연의 울림이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바로 그렇다고 대답할 준비가 되어있을거라는 생각을 계속해서 하면서 바다를 건너고 있었다구요, 눈물을 흘리면서… 그건 그냥 눈물이었지만, 또 한 편으로는 지난 몇 년동안 쌓이기만 했던 감정의 만년설 따위가 녹으면서 흐르는 또 다른 눈물과도 같은 것이었죠. 하여간 누군가 정말 물어볼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언제나 그렇다, 는 대답만 마음에, 아니 내 마음의 몸에 품고 살고 있겠노라고… 앞으로 또 어떤 결과가 내 앞에 찾아오더라도, 아무런 두려움 없이…
그냥 그런 생각을 했어요. 밥과 떡국을 위한 국물이 풍기는 냄새와 어디에선가 가져온 음악의 리듬과 멜로디, 이런 것들이 이십일 가까운 기간 동안 썰렁하게 비워두었던 저의 소중한 공간을 채우고 있네요. 이제야 사람이 사는 것 같아요. 게다가 아주 오랜만에 저의 마음도 따뜻하더군요.
이제 내려가서 와인 한 병을 마저 따려고 해요. 새벽까지 마시다가 잠들려구요.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제가 가지고 있는 것, 그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많이많이 나눠 드릴께요.
# by bluexmas | 2008/01/01 14:46 | Life | 트랙백 | 덧글(6)
저도 많이 받고 나눠드리고 싶습니다,
그게 뭔진 몰라도 말이죠^^
잘 돌아가셔서 다행이에요.
(….하기사, 좀 찌사-_-하게 1월1일에 여는 곳이 없지요 ㅠㅠ )
그래도, 무사히 잘 돌아오셨으니 다행이에요! 😀
Happy New Year! 🙂
비공개 덧글입니다.
같이일하는 친구가 한국교회에서 새해예배를 드리면 떡국 준다는 소리에
순간 침을 꼴깍;; 무교인데도 갈뻔했어요. -_-
남쪽은 날씨가 따닷해서 새해분위기가 참 안나는거같아요..
티비보는데 뉴욕에서 사람들이 길거리에 다 나와서
두터운 자켓을입고 들뜬분위기로 카운트다운을 하는데
‘아.. 저긴 새해구나.’ 막 이랬다는;;
반팔입고다니는 여기날씨는 정말 새해같지도 않단말이죠. =_=
그래도 요리좋아하시는 블루크리스마스님 요리로 새해를 시작하셨네요 ㅎㅎ
새해엔 좋은일만 있으시길! HAPPY NEW YEAR.
재인님: 감사합니다. 살짝 감기 걸린 것 같아서 힘드네요.
笑兒님: 뭐 바로 혼자 사는 생활로 돌아온 것이죠. 적응을 금방 해야 될 텐데…
비공개 2님: 도마는 목을 빼도 괜찮은데 칼들이 목을 빼면 좀 무서울 것 같아요-_-
비공개님도 마음 훈훈한 한 해 가지졌으면 해요^^
샤인님: 흐흐 떡국의 유혹을 잘 이겨 내셨군요~ 그래도 저는 따뜻한게 좋아요. 사실은 서울에서 엄청 떨다 왔거든요. 샤인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