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턱걸이를 통한 연말 결산과 새해 인사
초중고 시절, 저에게 있어 체육시간은 악몽이었죠. 신체적인 조건으로 인해 할 수 있는게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까요. 언제나 거의 모든 실기평가를 못했던 저에게 최악 가운데 최악은 단연 턱걸이로, 몸에 비해 팔다리가 가늘었던 저는 턱걸이를 단 한 개도 할 수 없었죠. 그래서 중학교 3학년 때 체육 선생님은 늘 ‘그렇게 턱걸이를 못하면 체력장 점수도 나빠질거고, 그렇게 되면 연합고사에서 벌충해야 되는 점수가 몇 점인데…’ 라는 말로 턱걸이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워낙 nerd였던 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죠. 체력장 빵점 맞아도 고등학교 갈 만큼 시험 점수는 받을 수 있었으니까요.
하여간 노력하나 안 하나 여전히 턱걸이는 빵 개였던 중 3의 체력장 날, 되도 않는 턱걸이를 하러, 아니 사실은 그냥 철봉에 매달리는 시늉을 하러 무리에 섞여 앞으로 나가는데, 옆에 있던 체육 선생님이 그러더군요, ‘철수(가명) 열 다섯개…’ 그래서 저는 매달리는 시늉도 하기 전에 벌써 열 다섯 번의 유령턱걸이를 했고, 그걸 불렀더니 또 기록하는 선생님은 열 여덟개로 적더군요. 해서 고등학교는 무사히 갈 수 있었죠, 저렇게 걱정해 주시는 여러 사람들의 보살핌으로. 대학교 갈 때는 아마 체력장이 없었을거에요.
그렇게 살던 저였는데, 운동을 몇 년 계속하니까 사람이 된 것인지 올해는 턱걸이가 되더군요. 그러니까 태어나서 처음으로 턱걸이를 하는 데 서른 하고도 두 해가 걸린거죠. 그만큼 2007년은 저에게 의미있는 해였다는 얘기를 하려다보니 좀 먼 길을 돌아왔네요.
재작년 12월, 여러해동안 벌어졌던 이러저러한 상황들 때문에 우울했었던 마음을 달래보려 여행을 갔다 오면서, 2007년에는 써야되겠다, 라는 마음을 먹었어요. 뭘, 어떻게…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것까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고 일단은 그냥 쓰고 싶었어요. 따지고 보면 그것은 아주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 두었던 저를 인정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죠. 저는 아주 오래 전부터 제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그걸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요. 인정하기를 두려워했다고나 할까요? 하여간 그 여행에서 돌아오며 그렇게 먹은 마음이 무슨 결과를 어떻게 낳게 될지는 모르지만, 이제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죠. 그리고 며칠 후, 막히는 통근길 도로 위에서 서울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낯뜨겁게 이런 마음을 얘기하고는 걱정을 들었어요. 하여간 그렇게 새해를 열었죠. 그리고 곧 블로그를 다시 열 수 있었던 건, 주인조차도 버린 블로그에 비공개로 남겨진 글을 잘 읽었고, 또 읽고 싶다는 내용의 덧글이었어요. 그러니까 그 덧글은 글쓰기를 위해 제가 아주 오랜 시간 짜 왔던 책상의 마지막 다리와도 같은 것었으니, 저는 그렇게 짜여진 탄탄한 책상 위에 벌써 여섯 살이나 먹어서 워드와 PDF외의 프로그램을 돌리는 데는 약간 버거워진 노트북을 올려 놓고 뭔가 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뭐 그렇다고 해서 제 삶이 달라진 것도 아니고, 이 누추한 블로그나 버거워하며 꾸려 나가는 정도지만, 그래도 이거나마 두려움 없이 하는 지금의 상황이 저에겐 얼마나 다행스럽게 느껴지는지 모르겠어요.
2007년은 뭐랄까, 결국 뭔가 쓰고 싶다는 저를 인정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 전반적으로는 저 자신을 찾을 수 있던 한 해로 기억될 것 같아요. 그건 좀 더 파고 들어가 보면 저 스스로에 대한 새로운 무엇인가를 찾았다기 보다는, 언젠가부터 그렇게 있었던 것을 이제서야 인정한다는 셈이 되겠죠. 꽤나 기나긴 시간동안 딱히 싫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인정하기 어렵고, 또 그럼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선뜻 보여주기 어려운, 그런 저의 부분이 있었거든요. 대체 뭘 걱정했을까… 돌아보면 우습기도 또 측은하기도 하지만 결국엔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할거라는 두려움 같은게 있었겠죠. 사실 정말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제 삶에서 달라질 부분이란 아무 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구요. 하여간 그렇게 아주 오랜동안 안개처럼 끼어있던 두려움을 한 해 내내 떨쳐내고 나니 이제 좀 기분이 개운하네요. 언제나 그래왔듯 소심한 인간으로 사는 운명이 내 것이려니, 라고 생각하고 늘 어깨에 짊어지고 살았던 것 같은데 이제는 피곤해서 더 이상 그렇게 하고 싶지 않더라구요.
아, 졸립지는 않지만 시차 때문에 멍해서 글을 계속 쓰기가 살짝 피곤해지는데, 작년 한 해를 그런 과도기처럼 겪었으니만큼, 올해는 그걸 바탕으로 좀 더 원하는 삶을 살아볼 생각이에요. 아무래도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건 계속해서 조회수 걱정이나 나를 너무 많이 보여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따위를 떨치고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쓰는 것이겠죠. 작년에는 너무 무규칙 이종 식도락 선수처럼 이것저것 해 먹었던 것 같은데, 올해는 파스타랑 아이스크림에 주력해볼까, 하는 생각도 있구요. 이런 얘기만 줄줄 늘어 놓고 나니 마치 회사 따위는 놀고 먹으러 다니는 놈 같은 분위기로 흘러가는 것 같은데, 뭐 그건 너무 기본적인 얘기라 여기에선 할 필요가 없겠죠?
그리고 새해의 첫 글을 쓰는 김에, 언제나 블로그를 찾아 주시는 분들께 감사의 인사도 아울러 드립니다. 언제나 마이너고 또 그럴 수 밖에 없는, 아니 그런 마음만 가진 블로그인데 밸리를 거치지 않고도 부러 먼 길 찾아와 주시는 분들께는 늘 고마운 마음 가지고 있어요. 하지만 저도 사람이다보니 까칠하거나 싸가지 없게 대해서 외로움을 팔아 먹는다느니, 외로운 척 해서 사람들의 관심이나 구걸하려 한다느니, 와 같은 종류의 가시 돋힌 말씀을 해주신 분들께는 그저 심심한 이해를 구하려고 해요. 알고 보면 제가 정말 그런 사람인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아니면 종종 이 블로그에서 보이는 것만으로 개인의 삶을 재구성하려는 분들이 계신지도 모르죠. 오호라, 30대 싱글 남성으로 집에 돈은 좀 있었는지 미국 유학 후 현지 취직, 식도락과 각종 자질구레한 취미를 즐기는 별 고민 없어보이는 인생…그렇던가요? 그렇다면 그런 거죠 뭐.
어쨌거나, 어제도 얘기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복 받으라는 얘기 많이 해서 나쁠 것 없잖아요? 저는 저녁 삼아 늦은 떡국이나 끓여 먹으려구요. 계속해서 시차 때문인지 몸 움직이기가 버겁네요.
# by bluexmas | 2008/01/02 07:20 | Life | 트랙백 | 덧글(9)
비공개 덧글입니다.
비공개 덧글입니다.
비공개 덧글입니다.
비공개 덧글입니다.
conpanna님: 저는 복 많이 받을건데 conpanna님은 차 사고 해결 잘 하고 계신가요?
비공개 2님: 라식 수술 후 모니터 들여다보면 안 좋다던데…당분간 제 블로그 오지 마세요. 흐흐… 뭐 다음을 기약해야죠. 아쉬움은 언제나 남는 것이잖아요.
j님: 벌써 득도한지 오래라… 그래도 제 블로그에는 악플이 거의 없다시피해요. 감사드릴 일이죠.
비공개 3님: 그러게요, 저도 어떻게 파는지 궁금한데 어디에 물어봐야 될지 몰라서 썩을때까지 창고에 쟁여두고만 있어요. 사람들은 모두 외롭죠. 다들 누가 더 외로운가 싸우는거에요. 남들한테 더 외롭다고 인정받고 싶어서요.
비공개 4님: 저야 언제나 즐겁게 읽어주시면 고마울 따름이죠. 저는 뭐 그렇지만 외국사람들하고 가정 이루고 사시려면 많이 힘드신건 아닐까, 그냥 생각해요.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맛있는 음식 앞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솔직해 진다는 생각에서 사람들의 음식 이야기을 좋아하고 그중에서도 빵을 만들고 그맛을 즐기는 사람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았던 점이 님댁으로 찾아오게 만들었나봐요.
작년 하반기에 우연히 들리게 되어 자주 발걸음 했었는데 늦었지만 새해 인사라도 드려야 하지 않을까..싶어서..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