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의 조각들

 12월 28일 금요일 오후 여섯시 경, 친구 녀석과 저는 오목교에서 시내쪽으로 나가는 5호선 전철 안에 있었어요. 제가 전철을 갈아타기 위해 영등포 구청에서 내리려고 할때, 녀석이 서 있던 곳 바로 앞에 자리가 나더라구요. 녀석은 북쪽으로 먼 길을 가야 되었기 때문에 저는 얼른 앉으라고 했지만, 못내 주춤거리더군요. 괜찮다니까, 앉으라구… 저는 녀석이 편하게 앉아가게 하기 위해서라도 빨리 전철에서 내렸는데, 사실 별로 괜찮지 않았어요. 이렇게 몇 년간 여러번을 들락거릴때마다 만났어도 같이 술 한 잔 못 먹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2. 떠나기 전날인 12월 30일 오후 세 시 조금 넘어서, 저도 어딘지 잘 모를 동네까지 차로 데려다준 또 다른 친구 녀석은 그럴거라고 생각도 못했는데 차를 세우고 내리기까지 해서는 인사를 하고 가더라구요.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미안하게… 차가 눈 앞에서 미끄러져 나가듯 조금씩 멀어졌지만 일부러 쳐다보지 않았어요. 정말 어디 멀리 가는 기분이 들까봐.

3. 그리고 몇 시간 뒤, 저는 집 근처 어딘가의 버스 정류장에서 서울에 가야되겠다는 사람을 강남역으로 가는 고속(좌석?)버스에 태우고는 손을 흔들었는데, 버스가 멀어지는 걸 보고 택시를 잡으러 걸어 내려오면서 문득 생각이 들더군요. 그냥 같이 버스에 타고 인터체인지까지 갔다가 올 걸… 뭐 요즘 버스는 뛰어서 쫓아가봐야 잡을 수도 없고 세워주지도 않은지 오래니까, 어쩔 수 없죠. 그냥 집에 돌아오는 수 밖에.

4.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 여유있게 공항에 도착해서 표도 받고 짐도 부치고, 또 너무나도 맛 없는 지하층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저는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들어가겠다고 했죠. 어차피 들어가야 하니까, 또 있어봐야 뻔하니까…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서 라운지에서 맛없는 에스프레소 더블샷과 과일과 온갖 것들을 집어 먹고 작은 서점에서 책 한 권을 마침내 고를 때까지 백 권을 뒤적거리고 전화를 여러통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제 차례는 내일 올 것처럼 시간이 많이 남더라구요. 그래도 별 수 없었죠, 정말 오래 있어봐야 뻔하니까. 그 감정이라는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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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겆이를 마치고 났더니 손이 시려워요. 올해는 언제나 따뜻했던 이 동네에도 제법 겨울다운 겨울 날씨가 꽤 자주 찾아 오네요. 시간이 지나니까 집 나갔던 정신도 다 돌아오고 감기도 나았지만 웬지 좀 여유를 부리고 싶어서 속으로는 아무 바쁜 일 없는 척 밍기적거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찾아온 추운 날씨처럼 매서운 현실의식이 싸대기를 냅다 강타하고는 유유자적, 등을 돌려 또 다른 저 같은 놈 싸대기를 때리러 떠나는게 보이네요. 덕분에 정신 번쩍 차리고는 다시 열심히 긴장하게 되었죠. 그러나 사실 속에서는 아직도 저런 순간의 조각들이 미친듯이 속을 헤집고 돌아다니고 있네요. 비단 저 위에 늘어놓은 조각들이 아니더라도, 그 길지 않은 시간 동안 겪었던 꽤 많은 작별의 순간들 역시 자기네들을 무시하지 말아달라는 듯 저 큰 조각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 모양이에요. 그러고보니 돌아보면 언제나 저는 돌아서기만 했던 것 같네요. 늘 뭐 ‘잘 지내(설사 그러기를 온 마음으로 바라지 않더라도)’, ‘또 봐요(어째 이게 마지막이라는 기분이 들더라도)’ 와 같은 말들만 남기고… 그러나 돌아선 다음에 다시 돌아 본 적은 없었을거에요.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그러면 정말로 어딘가 아주 먼 곳으로 떠나는 듯한 기분이 들기 마련이니까.

아, 오늘 보름달도 아닌데 제 안에 잠자고 있던 신파의 늑대가 완전히 눈을 떴나봐요.

 by bluexmas | 2008/01/16 13:47 | Life | 트랙백 | 덧글(7)

 Commented at 2008/01/16 13:54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나녹 at 2008/01/16 15:24 

저는 여름에 들어갔었는데…비슷할..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 많이 있었던 거 같아요. 이번엔 집안에도 큰 (좋은)일이 있기도 했고.

 Commented by conpanna at 2008/01/16 15:43 

추운 날씨는 우리가 느끼는 감정만큼 냉정하지 않나봐요. 겨울이 되면 언제나 그랬듯 찜통같이 더웠던 여름에 했을법한 잡생각의 양보다 곱절도 더 될 것 같은 온갖 기억이 다 떠오르거든요. 냉정해 질 수 없는 겨울날 오후 주절거려봤어요.

(한국도 오늘이 올 겨울들어 가장 추운날이래요..정말 아침에 주차장에서 사무실 걸어오는데도 귀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Commented by blackout at 2008/01/16 16:08 

후훗, 까치산역민으로써, 오목교역, 반가워요~ 그런데 그렇게 멀리까지 무슨일로?

 Commented by j at 2008/01/17 10:31  

신파의 늑대가 눈을 떴나봐요…아 느무느무 웃긴 것 아시죠? 마지막 문장에서 멜로에서 코믹으로 급반전하는 느낌이에요

슬픔을 유머로 승화시킬 줄 아는 bluexmas님, 한 수 가르쳐 주시죠! ㅎㅎㅎ

 Commented at 2008/01/17 14:32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08/01/18 13:11 

비공개 1님: 제가 좀 단정하게 보이려고 잘라냈죠^^ 신파의 늑대는 제 안의 위험요소라서…

나녹님: 그럼 저와는 정 반대셨던 것 같아요. 물론 뭐 저에게 나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conpanna: 여름엔 더워서 생각을 안 하게 되니까 아무래도 그렇겠죠. 추우면 더 예민해져서 그런걸까요?

blackout님: 친구 회사가 오목교 역에 있어요.

j님: 웃으셨다면 저도 기뻐요. 사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_-;;;;

비공개 2님: 저도 받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