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아침

.두개골에 실금이 간 것 같은 두통을 안고 잠에서 깬다. 아홉시. 어제의 계획은 그랬다. 아침을 만들어 가서 다 같이 나눠 먹고, 적당히 일하다가 오후에 현장에 나가서 의자 천 개 점검해주고 다섯시쯤 퇴근, 오랫만에 체육관에 들러 운동을 하고 바에 들러서 맥주 두어병 마신후 귀가, 또 아무거나 눈에 띄는대로 마셔주고 취침.

그러나 오늘 현장에 안 나가면 안되겠냐는 전화를 받았을때 일찍 퇴근하기는 글러먹었다는 걸 깨달았고 결국 일은 아홉시에 끝났다. 운동은 건너뛰고 바에 들러 맥주를 마시다가 사람이 많아질때쯤 집에 돌아왔다. 열한시였나? 내가 만들어간 음식으로 아침을 먹고, 또 그걸로 점심을 먹고, 저녁은 집에 와서야 먹었다. 냉장고에 밥이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그제 코스트코에서 산 포도주를 따서 마셨는데, 정확하게 무슨 맛인지 느낌이 없었다.

금요일 저녁에 늦게까지 일해야된다는 사실보다 나를 더 짜증나게 했던 건 어제가 나의 최악의 날 가운데 하나였다는 사실이었다. 뭐 날씨가 덥다고 해도 그냥 덥구나, 라고 생각하고 에어콘을 안 틀면서 버텼는데 그저께 밤엔 정말 더웠고 나는 열어놓은 창문을 닫기 귀찮아서 그냥 잠을 청했으나 거의 잠을 잘 수 없었다. 알고보니 요즘 낮 최고 기온은 36도, 수자를 접하고서야 멍청한 나는 이제 에어콘을 틀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어쨌거나 어제 나는 정말 넋이 나가있었다, 왜 그런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내가 하고 있는 일이, 건물이 머릿속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이 연결되기 때문에 언제나 자신이 맡은 건물의 부분을 정확하게 머릿속에 그려가면서 일을 해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어느 부분에서 생긴 변화를 다른 부분에 반영시킬 수 있는데, 어제의 나는 완전히 백지였다. 그래서 결국 늦게까지 일을 해야된다는 사실보다 뭔가 삐걱거리고 있는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결국 한 번은 쌍욕을 하면서 마우스를 집어던지고야 말았다. 누군가 늦게까지 일하는 사람이 또 있었지만 아무도 한국말을 모르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만은 마음에 들었다. 어쨌거나 누가 알아차리거나 말거나 그건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내가 아니까… 결국 아홉시까지 일했지만 나는 세 명 가운데 가장 먼저 퇴근하는 사람이었고 J에게 아무래도 오늘은 내 상태가 별로 안 좋았던 것 같다고, 어떻게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얘기를 했다.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그들이 내가 오늘 헤맸다는 걸 알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언제나처럼 뭐 이렇게 금요일 저녁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올때면 드는 생각은 오직 한 가지 뿐이다. 나는 이제 힘들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러니까 이런 나날들을 보내는 와중에 어쩌다 마주치는 누군가에게 ‘요즘 이러이러해서 일은 맨날 늦게까지 해야되고 재미있는 일은 별로 없고 나이는 먹어 가며 주머니에 모이는 돈은 별로 없고 경기는 나쁘다고 하고 회사에서 월급은 다들 안 올려주는 것 같아서 힘들어요’, 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사람이, 아니면 적어도 내가 ‘젠장 이제는 더 못 견디겠다니까’ 라고 말할 수 있는 정도의 고통이란 과연 어느 만큼일까… 뭐 그렇고 그런 쓸데없는 생각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고 누군가 그러지 않았던가, 따라서 나는 아직도 고통이라는 이름의 빙산을 이제 막 일각만 핥고 있는 건 아닐까? 그 옛날옛적 재채기하는 여자아이와 민들렌지 뭔지 잘 기억 안나는 노란 꽃을 내세워 광고했던 감기약 브론치쿰 시럽을 얼려서 만들었는지 언제나 쓰디쓰기만 한 빙산, 게다가 얼마나 큰지도 모르는… 뭐 그런 고통이라는 존재. 아무도 등 뒤에서 채찍을 들고 때려가며 핥으라고 그러지 않지만, 나는 그것이 인간존재의 기본의무조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고개를 박고 혀를 내밀어 빙산을 핥는다. 쓴건 원래 그런거니까 견딜 수 있다고 해도, 가끔은 너무 차가운 나머지 혀가 달라붙는다, 그러나 아무도 뜨거운 물을 컵에 담아서 기다리고 있지 않는다, 다들 자기 빙산 핥기에 너무 바빠서.

 by bluexmas | 2008/06/07 23:03 | Life | 트랙백 | 덧글(4)

 Commented by zizi at 2008/06/07 23:15 

많이 힘드신가봐요. 간단한 말로 힘을 줄 수 있는 책이나 영화를 접할 시간이라도 나면 조금은 나아지던데.. 기운 내시길 바랍니다.

 Commented by basic at 2008/06/08 01:24  

사람이 힘들다고 느끼는 건 크고 작음의 차이일 뿐. 모두 다 똑같은 것 같아요. 저도 요즘은 이유도 모르는 채로 힘들어 하고 있지요. 매일매일 몸이 허해지고 뭔가가 빠져나가는 느낌? 하지만 그러면서도 하루는. 카푸치노 위의 풍성한 거품에. 마치 내가 좋아하는 구름 모양이랑 같구나. 하면서 위안받기도 하고. 그런 게 인생인 듯 해요. (결론이 삼천포 같지만;;;)

 Commented by 보리 at 2008/06/09 07:28 

oh, who cares… 그냥 자기가 힘들다면 힘든 거죠 뭐… 상대적으로 따지다보면, 그야말로 말도 안되는 삶을 산, 전 인류 중 1인만이 나 힘들어 라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으니까요. 내가 힘들다고 여기면 힘든 거고, 힘든게 아니다고 하면 안힘든 거구요. 자기의 기준도 또 시간에 따라 달라지잖아요. 그러니… 힘들다고 말할 수 있는 자격증을 발급해드릴께요. =)

 Commented by bluexmas at 2008/06/09 12:26 

zizi님: 책을 계속 읽어야 되는데 집에 있으면 뭔가에 집중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그냥 누워서 텔레비젼만 봤어요. 다음주에 혹시 일이 좀 한가해지만 다시 책도 좀 읽고 해야죠^^

basic님: 돌이켜보면 그냥 일이 좀 고되어서 그런 것 같아요. 날은 계속 더워지고 기운이 떨어지는거죠 뭐…

보리님: 뭐 청계천 갈아엎은 그 양반도 요즘 국민들이 자기 말 안 들어서 힘들어 죽겠다고 하겠죠? 주말에 계속 먹고 잠만 잤으니 좀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