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와 정리
청소만 하고 정리를 안 하거나 정리만 하고 청소만 안 할 수는 없다. 둘은 배우자 관계니까.정리 안 하고 청소만 해 봐야 빛이 안 나고 정리만 하고 청소 안 하면 밥 먹고 물 안 마신 것 같이 뭔가 걸리는 기분이다. 의학적으로 증명되기를 밥 먹고 물 마시는게 위산을 촉진시켜 소화에 좋지 않다고 누군가 그랬다지만 난 모른다. 그냥 밥 먹고 물은 한 바가지 정도 벌컥벌컥 마셔야 되니까.
어쨌든, 정리를 하고 있다. 넓디 넓은 집에 공간이 부족하다면 날벼락 맞을 불평이긴 한데, 직업인의 눈으로 보았을 때 정말 말도 안 되게 짠 평면 때문에 공간을 효율적으로 쓸 수가 없는게 지금 사는 집의 문제. 게다가 가구가 없어서 다들 눈에 안 보이는데다가 집어넣어버리고 시각적 안정감에서 비롯한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가 없다. 이 곳에서 발 붙이고 사는 게 해결되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다, 참는 수 밖에.
컴퓨터를 놓고 쓰는 방에 이제 씨디가 너무 많이 널부러져 있는데 새로 씨디를 수납할 가구를 사는 것도 멍청한 짓이고 디지탈시대에 mp3로 변환시켜놓고도 씨디를 꽂아 놓는 것 자체가 멍청한 짓이라는 생각이 들어 일단 듣지 않는 씨디들을 꺼내서 jewel case를 버리고 씨디는 한데 모아서 CD 앨범에 넣는다. 그리고 최근에 산 보다 멀쩡한 씨디들을 수납장에 채워 넣는다. 집을 정리하는 일은 일종의 퍼즐 맞추기와도 비슷하다. 하나씩 밀어서 제자리에 넣고 그렇게 해서 생긴 빈 자리에 또 다른 것을 채워 넣는다. 그런 선형적인 과정을 되풀이해서 하다 보면 완벽하지는 않아도 시각적 안정감이 찾아오고 곧 마음의 평화도 찾아오게 된다. 사실 청소와 정리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몸을 굴려 물건들을 옮기는게 아니라 그 물건들을 어디에다가 재배치해야될지 생각하는 것이다. 그냥 몸만 움직이다가는 이 물건을 저리로, 저 물건을 이리로 옮기다가 짜증이 나서 싹 쓸어다가 불태워버리고 싶다는 욕망에 불타오르게 될 뿐이다. 그러므로 사실 청소와 정리는 일종의 고난이도 정신노동이다. 지방 신문의 음식면과 가정용 요거트 제조기의 설명서는 과연 같은 공간에 자리잡을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어디에다가 보관해야 하는가? 수없는 정의와 재정의, 나열, 배열과 같은 질서를 부여하는 과정을 거치다 보면 결국 물욕을 부리는 건 바보짓이라는 지극히 비현대적인 정신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그대, 그 경지에 이르렀다면 입산하시도록. 날이 아직 더우니까 삭발도 그렇게 나쁘지 않을 것 같소이다.
# by bluexmas | 2008/08/12 11:51 | Life | 트랙백 | 덧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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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rtle님: 레시피가 나와있어서 가지고 있는데 곧 버리려구요. 보면서 요거트 만들다 엎어서 반은 걸레가 되었답니다^^
비공개님: 저도 그런 밀고당기기, 좀 알죠. 어떻게 아냐하면요…
산만님: 사실은 모니터로 염장지르고 싶었던 건데 키보드에 당하셨군요. 오래된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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