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의 산미와 돈세탁 음모론

지난 토요일에 맛있는 커피를 마셨다. 에티오피아(아이스, 8천 원)였는데 복숭아와 딸기 향, 적당한 탄닌과 신맛 등등이 어우러져 매우 상큼한 커피였다. 주인이 고를 때 ‘에티오피아만 산미가 있다’고 부연 설명을 했고, 나는 의도를 정확히 이해 못했지만 어쨌든 ‘산미’ 있는 커피를 좋아하므로 주저 없이 골랐다. 무엇보다 시간축 위의 여운이 갑자기 끊어지지 않고 적당히 이어지는 게 매우 좋았다.
적당히 마시고 나오면서 나는 주인에게 커피가 맛있었다고 인사를 하며 물었다. 사람들이 산미 있는 커피를 안 좋아하나요? 그렇지 않아도 인터넷에서 신맛 나는 커피를 싫어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주워들은지라 겸사겸사, 스몰톡으로 꺼낸 이야기였다.
그런데 주인의 반응이 흥미로웠다. 일단 ‘원래 산미 있는 커피를 좋아하는 비율은 적다. 세계 인구의 10~20퍼센트 수준이다’라고 답하더니 파나마의 피터슨 가문 이야기를 꺼냈다. ‘뱅크 오브 아메리카의 회장을 지낸 피터슨이라는 사람이 돈세탁을 목적으로 게이샤의 가치를 뻥튀기해서 유명해지고 세계에 퍼진 것이다’라는 요지였다.
네? 음모론에 관심도 없고 처음 듣는 이야기였지만 어차피 일어선 참이라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 집에 와서 찾아본 바는 그렇다. 1967년 루돌프 A. 피터슨이 뱅크 오브 아메리카의 회장 자리에서 은퇴한 뒤 파나마 모 지역의 땅을 매입했다. 원래는 소 목장으로 썼으나 아들이 1973년 물려받은 뒤 198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커피 재배를 다각화했고, 이후 2004년 게이샤 품종을 발견해 파나마 커피 품평회(BOP, Best of Panama)에 출품해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말하자면 우리가 지금 ‘스페셜티 커피’라 분류하는 그 화사한 산미를 가진 커피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인데 어떤 이들에겐 그게 돈세탁 음모론으로 알려져 있는 모양이었다. 이 정도로 엄청난 이야기라면 나도 어떻게든 주워들었을 법한데 그런 기억이 전혀 없고 사실은 인터넷에서도 별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더군다나 커피의 산미가 매우 훌륭해 촉발된 대화라는 것까지 감안하면 정확하게 이 음모론을 꺼낸 의도도 이해가 잘 안 된다. 그래서 산미는 원래 의미가 없으나 일종의 조작된 취향으로 퍼져나가 지금처럼 자리를 잡았다는 의도였을까? 그렇게 치부하기엔 마신 커피의 산미가 너무 훌륭했기에 아직도 좀 어리둥절하다.
한편 산미 있는 커피를 좋아하는 비율이 10~20퍼센트라는 이야기도 수치 자체는 틀리지 않지만 생각해 볼 여지는 좀 있다. 요즘의 대세라고 할 수 있는 산미 있는, 섬세한 맛을 즐길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 건 비교적 최근이고 커피 전체의 역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매우 짧은 기간이다.
로스팅과 추출도 그렇지만 저장이나 유통 방식 등등의 변화 및 발전을 감안하면 아직도 커피의 대세가 섬세함이나 미묘함을 버리는 강배전 위주일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말이다. 물론 이건 요즘 대세인 약배전 혹은 중배전이 강배전 커피보다 더 우월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커피는 모든 상태에서 마실 수 있기에 커피이고 위대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사실 커피에서 신맛을 지울 수 있는지 그걸 잘 모르겠다. 물론 상대적으로 덜 느낄 수 있게 만들 수는 있지만 작물의 특성을 감안하면 원래 있는 것이라고 보는데… 하여간 커피 실무자분들 혹시라도 음모론에 대해 더 아시는 게 있으면 계몽 부탁드린다. 솔직히 그런 쪽으로 생각할 수 있는 거라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깜짝 놀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