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시간
사람들은 언제나 무엇인가를 기억한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기억하는 것들 가운데 정말 기억해야 될 필요나 의미가 있는 것들은 없는게 요즘 세상의 분위기가 아닐까 싶어요. 뭐 사람 이름이나 얼굴, 아니면 언제나 수자로서 표현되는 정보들, 전화번호, 주소(주로 아파트 동호수겠죠), 증시의 시황, 물리학에서의 위치 에너지 상수, 아무도 모르게 짝사랑하는 여자의 나름대로 눈대중한 몸 치수(36-24-38? 왕 글래머군요-_-;;;), 좋아하는 투수의 지난 5년간 승패와 방어율 등등등… 그러한 것들이 삶에 꼭 필요한 요소들이라는 믿기 어려운 딱지를 달고 기억되기를 강요 당할때, 정작 꼭 기억되어야 할 순간 따위 등등은 벽을 본 채 뒷마당 어딘가에서 쭈그리고 앉아 줄담배를 피우고 있을지도 모르죠. 뭐 이를테면 자기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던 그 갓난쟁이 시절에 너무나 수줍고 멋적어하는 탓에 자식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30년도 넘게 하지 않은 아버지가 자기에게 들려주었던 그 세 음절의 말, 딱 한 편의 만화만 볼 수 있도록 허락했던 엄한 부모님 밑에서 자란 덕에 하루 종일을 기다리고서야 볼 수 있었던 만화 딱따구리, 처음 여자친구를 집으로 초대해 만들어 주었던 음식의 레시피, 또 뭐가 있을까요? 그게 뭔지는 몰라도 아주 많을 거라는 사실 정도는 알겠죠.
뭐 따지고 보면, 꼭 그런 것들만 기억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에요. 어떤 기억들은 이러저러한 의미와 이유로 인해 살아남아야 하는데도 주인의 의도적인 회피와 거부로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찾지 못하는 경우도 있거든요. 뭐 이를테면 벌써 오래전에 박살난 사이의 전전 여친과 처음 갔던 4월 중순의, 그래도 제법 찬바람이 불어 웃옷을 벗어주어만 했던 동부이촌동쪽의 고수부지랄지, 떠올려보면 곧 자기차례도 돌아올 거라는 만고 불변의 진리만을 상기시켜줄 것 같아 억지로 눌러두고 있던, 자기를 아껴주었던 먼 친척의 장례식장 풍경이랄지, 어떤 이유에서든지 자기를 떠난 부모님과의 가장 좋았던 저녁도 있을 수 있고…이것도 따져보면 꽤나 많을텐데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슬퍼질까봐 자꾸만 감춰두게 되죠. 이미 바랜 다음에 꺼내보면 때는 늦을거라고, 다들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다더라구요.
뭐 그냥, 일광시간절약제의 시작도 다음 주로 다가오고 해서, 이제 해를 볼 수 있는 시간도 길어질텐데, 더 늦기전에 기억에게 조금 더 많은 시간을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계속 흘러가고 있는 시간, 무의미한 기억들만 잔뜩 실어서 흘려보내려니 어째 조금 아쉬운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죠. 평생 가는 것도 하나도 없고, 그 평생마저도 계속 가는게 아닌데.
뭔가 일이 생겨서 업데이트를 못하고 있어요, 답글도 못 달고 있구요. 바쁜 건 아닌데 일이 생기고 있어요. 쓰고 싶은데 계속해서 쓰지 못하고 있다구요.
# by bluexmas | 2008/03/04 15:29 | — | 트랙백 | 덧글(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