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사리 오지 않는 금요일
아침 내내 어제 현장에 나가서 했던 일들을 정리해서 시공회사에 메일로 날려주고, 점심으로 짜장면을 먹고는 바로 또 현장으로 가서 오후 내내 나의 사랑 의자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퇴근… 학교 체육관에 들러 달리기를 4마일 정도 하고 바에 들러 맥주를 세 병 마시고 바 옆의 빵집에서 통밀빵 한 덩어리를 사서는 집에 오는 길에 쉬지 않고 뜯어 먹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오랜만에 산 Columbia Crest Grand Estate Merlot을 홀짝홀짝 마시면서 야구를 보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한 시 쯤엔가 잠이 깨었는데 그냥 멍하니 앉아서 기타를 치면서 텔레비젼을 보고 있었다. Alton Brown이 Creme Brulee를 만드는 걸 보고 있노라니 어렵지도 않는거 나도 만들어봐야겠다, 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설탕을 얹고 지지는데 필요한 토치를 사기 싫어서 여태까지 만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냉장고에는 유효기간이 4일인가 남은 계란이 20개도 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아이스크림 만드는데 여덟 개, 쿠키 만드는데 두 개… 뭐 이런 식으로 계산을 해봐도 남은 며칠동안 다 쓸 재간이 없다. 그 생각을 하니 갑자기 계란을 써서 없애는 일이 무슨 세상을 악의 손길로 부터 지키는 종류와 같은 걱정거리처럼 느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코스트코에 원래 먹던 계란이 없어서 대체품을 산 게 잘못이었다. 어디엔가 쓰려고 깨보니 노른자의 색깔이 전혀 먹고 싶지 않은 종류라서 빵이나 과자 만드는데에나 써야되겠다고 나뒀는데 뭔가 만들 시간이 한참동안 없었다. 그러고보니 아이스크림을 만들때 갈라놓은 흰자도 잔뜩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갑자기 삶 자체가 커다란 골칫덩어리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쓸데없는 생각은 이렇게 원인을 전혀 파악할 수 없는 해일처럼 다가와서 한동안 고요했던 모래사장을 덮친다, 속수무책… 이왕 때릴거면 좀 아프게 때려도 괜찮아.
사실은 오후 내내 현장에 나가 있으면서 내가 없는 동안 회사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라는 생각을 했었다. 윗사람들은 다들 디자인 리뷰(오… 이런 문장에서 나도 ‘리뷰’ 라는 단어를 쓰는군!)에 들어가서 없고 나는 이쪽 프로젝트 일을 점심 먹기 전에 마무리하느라 정신없어서 그냥 메일만 날리고 나왔는데 괜찮을까…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큰 그림을 보자면 어차피 같은 회사에서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나는 이 일로 바쁜거나 저 일로 바쁜거나 상관없이 않을까나, 라고 생각을 하는데 일을 시키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지… 지금 내가 하는 두 번째 일은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니다. 단순작업이고 오래 하면 지겹지만 길게 보았을 때 내 경력에 꼭 필요한 일이고, 또 이렇게 돌아오는 기회가 자주 없기 때문에 있을때 붙잡고 해야만 하는 일인 것이다. 며칠 전에도 얘기한 것 같은데 같이 일하는 윗사람들이 다 휴가를 떠나서 지금은 이 일에 써야만 하는 시간이 늘어난 상황이라 신경이 쓰인다. 회사 얘기는…하자면 끝이 없는데 다 안 좋은 얘기라서 안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번 주에는 매년 한 번씩 하는 사원 전체 모임이 있었다. 하고 싶은 얘기가 너무나 많지만 지금은 할 수 없다. 그래서 아예 지지난주에는 뒤주를 하나 사다가 침실 벽장에 넣어놓았다. 아무에게도 할 수 없는 얘기는 그거라도 열어놓고 하게… 아니면 나중에 회고록을 쓰던가. 조각하나하나는 ‘비교적’ 멀쩡한 것 같은데 덩어리로 뭉쳐놓으면 크나큰 모순으로 보이는 것들이 가끔 있다. 그런데 더 웃긴건, ‘저것들을 조각조각 다시 떼어놓으면 처음 그랬던 것처럼 멀쩡하게 보이겠지’ 라는 생각으로 다시 떼어놓았는데 그 모순됨이 그대로거나 아니면 더 심해지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 옆에 붙어있던 덩어리한테 전염이 되는 것일지도.
뭐, 언제나 금요일은 그렇게 쉽게 오지 않는다는 생각을 한다. 게다가 휴일을 쓰는 체계가 다른 아랍권의 일을 하다보면 금요일 저녁 늦게까지 일하는 경우도 많아서 이렇게 금요일 저녁이면 특별히 할 일이 없어도 잠을 안 자고 멍하니 앉아 있는 때가 종종 있다. 그러다보니 그냥 주절주절 아무 얘기나 하고 싶더라는.
# by bluexmas | 2008/06/28 17:00 | Life | 트랙백 | 덧글(2)
저는 유학생입니다만.. 가끔씩 아침에 눈뜨고 방을 둘러보면서 이상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 때가 있지요, 뭐가 이리 많을까. 뭘 이런 곳에서, 자잘한 세간살이며 가구씩이나 사서 살림을 차리고 삶을 펼쳐버린 것일까. 사람 한명 사는데 재어놓아야 할 먹을 것 입을 것은 왜이리 많으며, 학교 전기 전화 은행, 여기저기 이름 석자를 걸쳐놓은 곳은 왜이리 많을까. 그 모든게 짐으로 덮쳐오는 듯한… 휙 다 버리고, 무겁지 않은 가방 하나로 휙 삶을 추려버릴 수 있다면 좀 기분이 나아질까, 라는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한답니다.
냉장고도 이모저모 잘 채워놓았을 때가 기분이 좋은가, 아님 텅텅 비우고 바닥을 싹 닦아버렸을 때가 더 시원한가. 스트레스의 척도인 것 같기도 하네요. 역시나 주절주절 아무얘기입니다만..가을에 찬바람이 불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요.
저도 한때 ‘유학생’ 이었고 뭐 지금도 그렇게 다른 상황은 아닌데 비슷한 생각을 많이 해요. 왜 이렇게 물욕이 많은걸까… 사는데 또 유지해야되는 건 왜 이렇게 많은 것인지,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다 줄이려고 해도 잘 안 되더라구요. 그러나 맨날 Big Sur같은데에서 맥북 하나 달랑 들여놓고 텔레비젼도 없는 삶을 살고 싶은 환상은 언제나 가지고 있어요. 물론 그렇게 살려면 지금처럼 혼자서는 어렵죠.
여기는 여름이 워낙 길어서 가을에 찬 바람은, 그때까지 살아있을 수는 있을까, 라고 생각이 드는 뭐 그런 시간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