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nse & stressful
기껏 집에 일찍 들어와서는 배가 터질때까지 꾸역꾸역 밥을 먹고 소파에 누워서 자다가 간신히 일어났다. 개수대에 설겆이는 넘쳐흐르고 처리해야 될 고지서도 있는 것 같고… 오늘같은 날은 저녁을 먹고 아예 소파 근처에도 가지 말아야 되는데, 그게 또 잘 안 되고 그러다보면 퇴근 후 생활에 악순환이 이어지게 마련이다. 일곱시나 일곱시 반 쯤 퇴근해서는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오늘처럼 밥을 식탁에도 못 가져가고 서서 문자 그대로 꾸역꾸역 먹고 바로 소파에 누워서 내쳐 자다가 열 한 시나 열 두 시쯤 일어나서는 하다 못해 설겆이라도 하고 한 시나 두 시 넘어서 정식으로 잠자리에 드는… 그럼 또 일어나야 될 시간보다 늦게 일어나지만 몸은 피곤하고 그러면 또 저녁에 집에 와서… 에휴-_-;;;;
그러나 오늘은 정말 피곤한 하루였다. 웬만해서 intense/stressful day라는 말은 잘 쓰지 않는데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으니까.
그래픽 프로그램을 써서 시각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직업의 말단사원이 가장 힘들때가 바로 옆에 높으신 분을 앉혀놓고 그 분의 요구에 따라서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어주는 건데, 바로 그런 일이 오늘 있었다. 그것도 점심시간이 막 시작되는 찰나에. 그 과정은 뭐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예를 들어 포토샵으로 뭘 만든다고 하면, 높으신 분이 옆에 앉아서 “거기 그 줄 그거 놓은 거 살짝 밑으로 내려봐, 조금 더, 조금 더, 어 좋아. 그건 됐고 저기 왼쪽 귀퉁이에 있는 글자 색깔을 지금 보이는 회색보다 아주 약간 연하게 바꾸는데 차가운 회색 말고 따뜻한 계통으로 바꾼 다음에 살짝 작게 만들어서 전체적으로 균형을 좀 맞춰보면…”
그러면 나는 바로 옆에서 마우스를 쥐고 앉아서 입으로는 yes를 열심히 대답하면서 눈은 모니터를 눈알이 뚫어질때까지 쳐다보면서 또 오른손으로는 마우스 버튼을 신경질적으로 클릭하고 왼손으로는 키보드를(가끔 yes를 할때 고개를 돌려 윗사람과 눈을 맞춰주지 않으면 또 윗사람께서 삐지실 수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다)… 뭐 어느 직장에서나 이런 일은 늘 있지 않을까 싶다. 문제는 저 위에서 벌어지는 대화가 슬프게도 우리나라말이 아니라는게… 그래도 결과물은 만족스러워서 다행이었다. 결국 점심시간이 늦어져서 바나나를 사러 수퍼마켓에 가지 못했다는게 안타까웠지만.
윗사람들 만족시키느라 좀 버겁기는 했지만 그건 별로 문제가 아니었고, 사실 나를 정말 피곤하게 했던 일은 건너편에 앉은 모 나라 출신 여직원의 내 일을 가로채려는 시도였다고나 할까… 이런 나라에 잠깐이나마 살고 있으면서 어떤 인종이나 특정 국가 국민을 싸잡아서 ‘흑인은 ##하다’ 랄지 ‘한국 사람은 $$하다’ 라는 얘기를 한다는 건 그다지 바람직하지도 않고 까딱 잘못하면 분쟁을 일으킬 소지도 있으니 언제나 신중해야만 하지만, 정말 저 모 나라 국민들은 전체를 꿰뚫는 뭔가가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뭐 자세히 얘기해봐야 남 욕이거나 회사일에 관련된 화제라서 자세히 들어가기는 싫지만 줄거리인즉슨, 지금 만드는 프리젠테이션 자료를 위한 회의를 처음 할 때, 질을 추구하기 위해서 Adobe InDesign으로 갈 것이냐, 아니면 효율성을 위해 Powerprint로 갈 것이냐를 정해야만 했었다. 이게 왜 문제가 되냐하면, 돈이 썩어 넘칠게 분명한 Adobe사는 회사서버에 설치해놓고 필요할때마다 네크워크에서 끄집어내서 쓸 수 있는 회사용 사용면허를 팔지 않기 때문에 이 회사에서 나온 정식 프로그램들, 뭐 포토샵이랄지 일러스트레이터 등등은 정해진 위치에 놓여있는 공용 그래픽 컴퓨터에만 설치되어 있고 사람들은 그 프로그램이 필요할 때 특정 컴퓨터에 가서 그걸 쓰도록 되어 있다. InDesign도 그런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라서 만약 이 프로그램으로 책을 만들게 되면 쓸 줄 하는 한 두사람이 여러 팀에서 각각 만든 자료들을 마지막에 합치는 작업을 전담으로 해야만 한다. 물론 파워포인트로 할 경우엔 여러가지 특성을 생각해볼때 결과물의 질은 떨어지지만 모두가 동시에 쓸 수 있는 프로그램이니까 누군가 전담해서 편집관리를 할 필요가 없어지고… 어찌해서 나는 팀에서 InDesign이 가능한 둘 중 한 사람이었고, 질을 생각해볼때 처음에는 InDesign으로 갈 것을 주장했지만 상황을 보아하니 내가 하고 싶거나 그렇지 않거나를 떠나서 파워포인트가 나을 것 같다고 결론을 내렸고 결국 모두가 파워포인트를 선호해서 그쪽으로 가게 되었다… 딱 한 사람의 반대를 무릅쓰고. 하여간 그 한 사람의 반대 및 InDesign 예찬이 워낙 강해서 윗사람께서는 ‘넌 너대로 인디자인으로 시도를 해 보고, 철수(가명)는 파워포인트를 써서 전체가 쓸 수 있는 마스터 슬라이드를 나랑 같이 디자인해서 만들자’ 가 결론이었고 어제와 오늘 계속해서 그 일을 했던 것이었는데, 그동안 아무런 얘기도 없다가 태도를 돌변해서 ‘지금까지 한 거 다 내놔라 내가 지금까지 한 것과 파워포인트를 합쳐서 마무리를 하리’ 를 주장하고 나서더라는 것… 지금까지 겪어본바로는 이 나라 애들이 워낙 영어도 잘 하고 막말로 교묘해서 까딱 잘못하면 ‘어 그래 ‘ 하고 다 넘겨줄 수 있는데 그러면 결국 나중에 가서는 다 자기가 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게다가 또 우기기는… 워낙 내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우기는 사람들한테 참을성이 없는 편이라 또 화를 낼 뻔했지만 그냥 애써 무시하고 하던 일 마무리지어서 각 팀에 돌리는 것으로 하루는 막을 내렸다.
이런 종류의 상황 묘사는 글로 해도 재미가 없어서 쓰고 나니 장황한데, 하여간 집에 오면서 사내에서 벌어진다는 경쟁이라는게 바로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미안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과 경쟁 안 한다. 언제나 하는 얘기지만 나 스스로랑 경쟁하기도 버겁다. 무슨 미친소리냐고 되묻는 사람도 있겠지만 하여간 그렇다.
어쨌든 하루, 일한 보람은 있었지만 여러모로 정말 피곤하구나…
# by bluexmas | 2008/11/12 14:40 | Life | 트랙백 | 덧글(4)
직장생활하면서 ‘난 경쟁하지 않으련다’라고 하면 자칫 꿈도 희망도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히기 쉽지만, 저도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