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치 마라톤의 내막

아, 오늘은 영 꽝이구나. 반환점을 돌기 전부터 그랬지만, 돌자마자 확실해졌다. 해가 머리 뒤로 넘어가면 몸이 가벼워질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황스러웠다. 비록 하프이기는 해도 달리기에는 ‘물이 반이나 남은 컵’이라는 말을 긍정적으로 쓸 수가 없다. 앞의 절반보다 더 힘들고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시계를 보고, 그동안의 경험으로 잽싸게 계산을 해보니 이 정도의 페이스라면 15km 안팎에서 근력이 떨어질 확률이 높아보였다. 뛰는 것도 고통이지만 그 근력이 떨어진 다리로 걷는 건 그보다 더 큰 고통이었다. 걸릴 시간만 순수하게 따져봐도 그랬다. 좌절이 땀방울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햇볕에 반짝이는 물이라고 생각했던 은색의 덩어리가 물 위로 떠올랐다. 그리고는 내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뭐지? 달리기는 언제처럼 고통스러웠지만 헛것이 보일 정도는 아니었다. 덩어리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오자 실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건… 멸치떼였다. 믿을 수 없었지만 멈출 수 없었으므로 계속 달리는데, 덩어리에서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땀으로 젖어 살짝 흐릿한 눈으로도 다른 놈들보다 씨알이 굵다는 걸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정도의 덩치였다. 그가 ‘1361번, 대상 확인 완료. 각자 위치로!’라고 외치자 덩어리가 둘로 나뉘어 각 발에 나눠 붙었다. 순간 발걸음이 조금 가벼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 이건 반칙이잖아. 비록 아마추어지만 스포츠맨십을 어길 수는 없었으므로 나는 입을 열었다. 이봐, 괜찮으니까 돌아가라구. 기록 따위에 연연할만한 상황도 아니고, 설사 그렇다고 해도 이런 도움을 받을 필요는 전혀 없었다. 기쁨이 준비되었다면 기쁨을, 고통이 준비되었다면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 그게 장거리 달리기다. 생각해보건데 이번 차례는 고통이었고, 나는 그걸 오롯이 내 몫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반환점을 돌고 나서.

달래 이 마라톤의 별명이 ‘멸치 마라톤’인 줄 아셨습니까? 왼발에 붙어있던 씨알 굵은 놈이 덩어리에서 빠져나와 입을 열었다. 실로 대장이라고 할만큼 씨알이 굵었다. 그리고, 그렇게 선심 써 주신다고 해도 어차피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이미 담수를 너무 마셔서 말이죠.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러니까 그냥 굿이나 보고 떡이나 드세요. 말씀하신 것처럼, 기록이니 뭐 이런 것에 크게 도움을 받으실만한 상황도 아니에요. 그동안 몸무게가 많이 느신 모양인데요? 갈치아저씨가 알려준 체중이랑 전혀 달라요. 이 정도로 살이 찌신 줄 알았다면 적어도 1개 소대 정도는 더 데려왔을 겁니다. 뭐 예정된 희생을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은 있겠지만.

그는 다시 덩어리로 합류했다. 이번에는 오른발이었다. 양 발이 조금 가벼워지기는 했지만, 미미한 수준이었다. 다섯 발짝 정도 앞서 갔던 두 시간 페이스메이커 그룹이 드디어 나를 추월할때도 더 이상 힘을 낼 수 없을 정도였다. 나는 다시 지치기 시작했고, 멸치들도 그래보였다. 은색 광채가 죽으면서 마르는 녀석들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결승점을 1km정도 남겨두자 발이 무거워서 뛰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래도 달고 뛰어야만 했다. 내 짐을 덜어주겠다고 담수까지 거슬러 올라온 녀석들이었다. 기록이고 뭐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코스마저 형편없는 이 아마추어의 놀이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우둔함. 누가 벌인 일인지는 몰라도 뒤치닥거리는 해야만 할 것 같았다.

무거운 발을 끌고 결승점을 지나쳤다. 늘 그렇듯 물을 한 병 받아들었다. 무려 해양심층수라 했다. 멸치들은 이미 바짝 마른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받아든 물이 해양심층수일지라도, 담수이기에 이들을 살리는데는, 설사 그렇다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아무리 깨끗한 민물도 가장 더러운 바닷물보다 쓸모가 없는, 깨끗한 것이 더러운 것에게 지는 상황이었다. 센서를 내밀자 봉지를 주는데, 속에는 얼룩진 완주 메달과 우마이봉, 마가린으로 만든 빵과 빈 상자가 하나 들어 있었다. 이 빈상자는 뭐에 쓰는 거죠? 내가 묻자 알바 진행요원은 대답 없이 턱으로 내 발을 가리켰다. 그제서야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멸치 마라톤의 내막이 무엇이었는지. 주위를 둘러보자 그제서야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다들 빈 상자에 자신의 멸치를 열심히 주워담고 있었다. 나만 빼고 다 알고 있었다는 분위기였다. 기록이고 뭐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코스마저 형편없는 놀이를 위해 담수까지 거슬러 올라와서 목숨을 바친 멸치를 주워담는 끔찍한 아마추어들이. 그래, 어쨌든 이 녀석들을 수습은 해야만 했다.

벤치에 엉거주춤,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이미 바싹 말라버린 멸치들을 떼어내 상자에 담았다. 마지막으로 ‘대장’을 집어 가운데에 올려놓았다. 눈꺼풀이 없는 이 불쌍한 종자들은 눈도 채 감지 못하고, 입도 다물지 못한채 죽어 있었다. 녀석들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액체가 얼굴을 타고 흘러 떨어졌다. 숨이 끊겨버린 줄 알았던 ‘대장’이 몸을 살짝 떨었다. 약해요, 약해. 싱겁다고. 파스타는 하루가 멀다하고 만들어 먹는다는 인간이 바닷물이 얼마나 짠지도 모르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 또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아빠, 우리 오늘 잔치국수 해 먹는거야? 아빠가 완주한 덕분에? 잔치국수만 있으면 완전 잔치분위긴데! 등 뒤로 아이의 재잘거림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나는 미동조차 할 수 없었다. 내 한 몸뚱이 가까스로 꾸려 나가는데 온갖 희생이 음으로 양으로 치뤄진 것이야 염치를 아는 인간이니 그럭저럭 알고 있었지만, 바닷것이 담수까지 거슬러 올라와 타죽는 희생까지는 바란 적이 없었다. 누가, 아니면 무엇이 대체 이렇게 불공평한 시나리오를 짜 놓고 목숨까지 바쳐 지키라고 삼라만상을 윽박지르는지, 그걸 알고 싶었다. 토요일 오전이었지만, 월요일 오후 같았다. 모든 종류의 몸과 마음을 위한 휴식이 나를 위해 타죽어간 멸치들이 거슬러 올라왔을 물의 길만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런 월요일 오후. 밀물은 영원이 다 가기 직전의 시각에나 체면치레하려고 찾아온다는 그런, 월요일 오후. 아아.

 by bluexmas | 2011/05/31 01:49 |  | 트랙백 | 핑백(1) | 덧글(5)

 Linked at The Note of Thir.. at 2011/12/31 17:45

… 100회) | [재동] 차우기-셰프 없는 셰프 음식 3위: 영화(6회) | <북촌방향>과 뜬금없는 시뮬라크르 4위: 창작(6회) | 멸치 마라톤의 내막 5위: 도서(3회) | 최근 읽은 것들 올해의 결산은 아주 간단하다. 거의 모든 것을 기다리다가 떠나 보낸 한 해였다. 흘려보낸 건지, … more

 Commented at 2011/05/31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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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ed at 2011/05/31 08:14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at 2011/05/31 15:53 

심지어… 맘대로 담아오는 거였나요…멸치들이 굵어보이네요

 Commented by 백면서생 at 2011/05/31 18:02 

수고하셨습니다. 완주라니, 대단합니다. 게다가 멸치까지 받고요. 국수 맛있게 드세요.

 Commented by 풍금소리 at 2011/06/01 15:26 

저것이 완주부상으로 받은 며루치인가요.

구수한 국수육수가 떠오르는 건 웬…행복한 오후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