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로] 주은(*)- 두 마리 토끼

문을 열고 발을 들였는데 느낌이 좋았다. 여유롭고 차분한 공간에 너무 힘을 주지 않은 동시대적 인테리어가 마음에 들었다. 그런 좋은 느낌이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한결 더 증폭되었다. 메뉴에 담긴 각 코스의 소개 글 덕분이었다. 가뜩이나 음식 전반의 언어가 정립되지 않아 장황하고 알맹이 없는 현실 속에서 딱 필요한 만큼만 설명하는 문구들이 좋았다. 상당히 고민해 쓰고 시간을 들여 다듬었을 거라 생각했다.
점심엔 과음하고 싶지 않아서 피하는데 이런 느낌도 오랜만이다 싶어서 와인 짝짓기를 주문했다. 한편 탄산수는 낯선 게 나왔는데 맛을 보니 기포가 크지 않을뿐더러 밀어붙이지도 않아서 흥미로웠고, 곧 나온 음식과 같이 맛을 보니 의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많은 레스토랑에서 산 펠레그리노를 내는데 그보다 음식과 훨씬 더 잘 어울리는 탄산수였다.

한 입 거리 완성도가 좋아 보여 기대를 품었는데 맛은 거기에 미치기도 미치지 못하기도 했다. 일단 오른쪽 맨 위의 증편은 힙스터들이 좋아하는 평양냉면보다 더 진한 메밀 향을 풍겼고 질감도 부드러워 훌륭했다. 두 번째 육회는 실행 및 완성도는 매우 좋지만, 형식-배 속에 육회를 넣은-에 밀려 배의 수분에 고기의 존재감이 파묻혔다. 노른자까지 가세하니 한 입 거리로는 부담스러운 면이 있어서 편집을 좀 하는 게 좋아 보였다. 배를 저며 고기를 감싼다든지 하는 식으로 양을 줄이거나, 아예 한 입 거리가 아닌 별도의 요리로 독립시킬 수도 있어 보였다. 마지막의 향병은 마의 매끄러운 질감에 매우 감탄하며 먹었는데 지금은 기억이 잘 안 난다.
회 보자마자 ‘그래, 파인 다이닝이라면 이래야지!’라는 감탄사가 (물론 속으로) 절로 터져 나왔다. 주요소인 전갱이와 오이, 참외 이 세 가지의 비례와 담음새만으로도 이미 완성된 요리 같은 느낌을 풍겼고 실제로 맛을 보아도 그러했다. 그렇다 보니 나머지 요소인 참나물과 초당 옥수수, 그리고 고추장 국물은 다소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았다.
참나물은 쌈과 비슷한 개념으로 전갱이-오이-참외를 아울러 주는 역할이라 이해하면 되지만 초당 옥수수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고 고추장 국물은 무엇보다 메뉴의 설명처럼 시원하지 않아 아쉬웠다. 물론 메뉴에서 말하는 시원함이라는 것이 온도가 아닌 맛의 감각일 수도 있을 텐데, 그쪽으로 보아도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다. 한마디로 고추장의 존재감을 조금 억지로 관철한 느낌이랄까?
물론 물회의 국물이 고추장 바탕인 것은 맞는데 파인 다이닝을 위해 재해석하면서도 굳이 고수할 필요는 없다고 믿는다. 기름진 전갱이, 그리고 오이와 참외의 (긍정적인) 풋내 등을 감안한다면 고추장과 매운맛 대신 신맛 쪽을 선택하는 게 더 강한 시너지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말하자면 냉국 쪽으로 기운달까?
더군다나 요즘 한국의 매운맛은 근원인 고추가 국산이든 아니든 강도가 계속 높아지고 있고, 그런 차원에서 이 국물의 ‘칼칼함’은 주재료를 음미하는데 썩 도움이 되지 않았다. ‘물회’가 아닌 ‘회’라면 차라리 오이와 참외에 맛을 들여서 국물 없는 방향으로 갔으면 더 재미있고 재료도 살리는 방향이지 않았을까? 마지막으로 초당 옥수수와 고추장 국물이 힘을 합치니 단맛의 존재감이 상당했다. 지지난달의 소설 한남도 그렇고, 이제는 파인 다이닝의 차원에서도 다른 맛은 안 그런 가운데 단맛은 적극적이다 못해 노골적인 수준으로 강한 것은 좀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다른 맛이 85의 수준에서 눈치를 보는데 단맛만 혼자 주저 없이 110 이상의 목소리를 내는 현실이 나는 매우 못마땅하다.
잡채 일제 강점기를 거쳐 당면이 개입되기 시작했다며 그렇지 않은, 이전 시대의 버전을 준비했다는 설명과 함께 요리에 쓰이는 버섯을 가지고 나와 미리 보고 냄새를 맡게 해줌으로써 기대를 한껏 고조시켜 준다. 요리도 그런 기대에 맞춰 매우 수준이 높았다. 이날 주은의 점심 식사를 단 한 단어로 압축하라면 ‘냄새’가 될 정도로 각 코스의 후각적 경험이 매우 근사했다. 공간이며 음식의 양 때문에 파인 다이닝에서 그렇게 냄새가 강하게 풍길 수가 없는데(물론 연출은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회 이후 등장하는 따뜻한 음식들의 한식적인 냄새가 일관적으로 훌륭했다.
다시 ‘잡채’로 돌아가서 이야기하자면 음식 자체로는 매우 훌륭한데 개념적으로는 조금 아쉬운 구석이 있었다. 한마디로 ‘잡채’라는 명칭에 걸맞지 않게 지나치게 정돈되었다. ‘雜菜’라면 여러 재료가 활동적으로 섞인 상황을 연출했다면 더 재미있었을 것 같다. 같은 맥락에서 전복도 버섯도 정말 맺힌 곳 없이 부드럽게 조리되었는데, 잡스러운 느낌이 살도록 질감에 대조를 주는 한편 시각적으로 재미있는 장식이 첨가되었더라면 완성도가 한결 더 높아졌을 것이다.
면 갑오징어와 마늘종의 ‘밀당’만으로도 이미 완성되었다. 다만 면의 수준은, 만족스럽지 않다고 말하는 건 아니지만 좀 더 높아질 수 있을 것 같다. 소설 한남의 면과 비교하면 그렇다.
장어 ‘느좋(…)’인 김에 먹을 수 있는 거 다 먹어보자고 그래서 추가 메뉴를 주문했는데, 장어의 지방이 좀 더 녹아나도록 바싹 구워야 했다. 고추장 양념은 좀 달았지만 그래도 좋았는데 장어가 미끈거렸다. 직화구이로 먹는 장어가 과조리되었다고 생각해서 파인 다이닝으로 재해석하면서 이런 결정을 내린 것도 같은데 아쉬웠다. 직화구이 1승.
반상 차림 솔직히 난 한식을 표방하는 파인 다이닝에서 마지막에 이런 식사를 안 냈으면 좋겠다. 싫어서 그러느냐고? 아니, 반대로 이렇게 차려 내는데 품이 너무 많이 들어간다고 보아서 우려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치르는 비용에 비해 너무 많은 걸 준달까. 백합국과 민들레나물이 좋았고 돼지감자 장아찌가 정말 훌륭했다. 이 정도의 단맛이 식사 후반부에 등장한다면 찬성이다.
숭늉과 토하젓 하, 토하젓을 먹었는데 나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던 저 먼 옛날 언젠가의 맛이 떠올랐다. 기억하는지조차 몰랐던, 당연히 실체도 뭔지 모르는 그런 맛이었다.
후식 산딸기 화채였는데 분명 좋았지만, 기억이 안 난다.
다과 메뉴대로라면 세 가지인데 잘 먹어서 좋다며 다섯 가지를 내주었다. 대체 제대로 된 흑임자 다식을 마지막으로 먹은 게 언제였을까? 30년은 확실히 넘었고 40년은 안 되는 것 같다. 지난번 소설 한남에서도 그렇고 한식 파인 다이닝을 표방하는 레스토랑들이 이제 찾아보기 힘든 고전 한식 병과류를 재현해 주는 거 그저 좋고 감사한다.
이런 코스에 와인 셋, 전통주 한 가지를 곁들였는데 다 좋았다. 그리스와 헝가리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약간 옆구리에서 나오는 느낌의 와인들이었는데 특히 고기 요리라는 이유만으로 떡갈비에 곁들였을 때 단맛 때문에 기가 죽을 수밖에 없는 레드(보쉬클루프 2023, 남아프리카 공화국 스텔렌보쉬, 쉬라 100%)의 짝이 특히 훌륭했다.
식사를 하고 나서 주변에 ‘가격 오르기 전에 빨리 가서 점심들 드시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평론가의 시각에서 몇몇 아쉬운 개념적인 부분들이 있었지만 실행은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훌륭하고 맛도 흠잡을 데가 없다. 지난달의 기가스에 비하면 두 배쯤 훌륭하고 소설 한남과 비교해서 훨씬 더 능수능란하면서도 신실하다. 현대화와 파인 다이닝화의 두 가지 토끼를 한꺼번에 잘 잡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