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천
이런 내가 못 견디도록 싫은 순간이 찾아온다. 그걸 ‘위기’라고 부른다. 아주 가끔 찾아오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데 별 불만이 없다. K 과장님이 바람이라도 쐬라며 비켜 준, 두 사람이 간신히 서 있을 수 있는 12층의 발코니에서 나는 불현듯 ‘뛰어내려버릴까’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을 고쳐 먹은 건 방법이 틀렸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지 거미줄처럼 얽히고 섥힌 복잡한 인연들 때문은 아니었다. 마지막이라면 깨끗하게 가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사람 많은 대로변에서 피범벅으로 민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마지막이라도, 아니 마지막이라면 체면은 차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체면 덕분에 위기를 흘려 보냈다. 곧 제자리로 돌아왔다. ‘두 시간의 잠+ caffeine crash+ 언제나 도망치고 싶은 마음+몇 개의 오류’가 부른 위기였다.
신논현역 앞에서 버스를 탔으나 양재역에 다다를 때쯤, 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날씨는 늦봄이었지만 버스는 한겨울 아랫목이었다. 일을 마쳤을때, 마음은 어디라도 가고 싶었지만 몸은 한 발짝도 내디디기 힘들었다. 버스도 티니위니 앞에 주저앉아서 기다렸다. 그러나 막상 버스가 왔을 때는 타고 싶지 않았다. 칠흑처럼 깜깜한 터널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지막 남은 일을 1분이라도 빨리 끝내려면 돌아가야만 한다-라는 생각으로 나를 밀어넣었지만 결국 양재역에서 내릴 수 밖에 없었다. 도저히 그대로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다음 버스가 올 때까지는 20분의 시간이 있었으므로, 시민의 숲까지 천천히… 아니 사실은 빨리 걸었다. 양재천을 건널 때쯤, 다음 버스가 오지 않을까 뒤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정류장에 도착하고 3분쯤 있으니 다음 버스가 도착했다. 자리가 하나도 없었다. 서서 오는 것도 딱히 나쁘지는 않았다. 버스가 오산 톨게이트를 지나자 기사 아저씨가 어디론가 전화를 하더니 끼어드는 마티즈와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급브레이크를 밟았다가 손님이 굴렀다는 이야기를 했다.
# by bluexmas | 2011/03/13 23:16 | Life | 트랙백 | 덧글(10)
요새 스트레스 많이 받으시는 것 같네요..
스트레스는 아닌 것 같구요. 그냥 뭐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