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봄인가
그다지 깊이 잠들지는 못했지만 생각보다는 멀쩡하게 오랜 시간을 잤다. 일어나자마자 바로 컴퓨터를 켜고 이달의 마지막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어젯밤, 멍하게 앉아있던 그 와중에 다행스럽게도 짜임이나 흐름 같은 것들이 생각났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쭈욱 써서 몇 시간만에 끝을 냈다. 메일로 보내고 나니 허탈함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두 달하고도 이주일 동안 머리를 못 잘라서 나갈까, 잠시 망설였으나 점심을 먹고 소파에 있으니 잠이 몰려왔다. 그대로 오는 전화도 무시하고 저녁까지 쭉 잤다.
해가 진 다음 일어났는데, 뜬금없이 라면과 삼겹살이 먹고 싶었다. 둘 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먹을까 말까 한 음식인지라, 그 둘이 한꺼번에 먹고 싶어지는 이런 경우라면 못 이기는 척 들어줘야 된다고 생각했다. 집 앞, 바로 길 건너에 새로 생긴 대형마트에 못 마땅한 행차를 했다.
이 마트로 가는 발걸음이 못마땅한 이유는, 이곳은 크기만 키워 손님을 끌겠다는 생각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물건은 형편없다. 가격도 절대 싸지 않다. 게다가 언제나 각 코너에서 끊임없이 마이크로 호객을 한다. 오늘은 “화이트데이는 고기를 먹으라고 대한민국 헌법 xxx조에 명시되어 있습니다”라는 멘트로 “브랜드” 삼겹살이라는 걸 세일한다며 호객했다. 가보니 그 “브랜드”라는 것의 정체는 독일산이었다. 독일산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질에 비해 가격이 어이없었다. 어쨌든 갈때마다 실망의 골이 깊어지는데, 오늘은 라면을 아예 낱개로는 팔지 않는다는 걸 알고 망연자실했다. 싸구려지만 맛있는 마주앙 샤도네이가 8천원에 팔리는 걸 찾아서 마음이 약간 누그러졌다. 그러나 오늘은 먹지 않기로 하고 그냥 지나쳤다. 결국 늘 가던 해태마트에서 라면과 삼겹살 200그램을 사왔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속으로 해태마트 화이팅, 을 외쳤다. 삼겹살은 먹을만 했고 라면은 맛 없었다. 사실은 계산하면서 슬쩍 물어봤는데 새로 생긴 빌어먹을 마트가 장사에 별 영향은 없다고 했다.
초등학교 때는 토요일 점심에 늘 무슨 별식처럼 라면을 끓여먹곤 했다. 그때는 정말 라면 끓이는 감이 훌륭했는데, 너무 안 끓여먹다보니 이제는 내가 끓인 라면을 먹기 싫어질 지경이 되었다. 이렇게 또 죽음과도 같은 3월 첫째, 둘째주를 보냈다. 이제는 봄인가 싶었다. 그러나 뉴스에서는 다시 꽃샘 추위가 찾아온다고 말했다. 샘낼 건덕지가 어디 있다고 또 추워집니까, 정말 염치가 없습니다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잔인한 계절이 지나갔다. 그러나 사실 잔인함의 근원은 계절도 아니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그저 내가 잔인한 인간일 뿐이었다. 이 모든 사건사고의 근원은 바로 그것이다. 나는 내내 알고 있었다. 고치고 싶어도 잘 되지 않는다.
# by bluexmas | 2011/03/14 23:56 | Life | 트랙백 | 덧글(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