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낮잠의 하루

두세시쯤 들어왔는데, 여덟 시도 안 되어 눈이 떠졌다. 밥벌이에 관련된 일은 미룰 수가 없다. 안하면 그만큼 손해보기 때문이다. 어떤 분의 블로그에서 숙제 안 하는 초등학생 이야기를 들었는데, 난 그랬던 기억이 없다. 밤에 숙제를 다 못하면 새벽에 일어나서 끝내고 학교에 가곤했다. 크게 보면 삶도 결국 숙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꼭 다 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잘하면 더 좋은데 문제는 이런 생각이 강박관념이 되어 늘 어깨를 짓누른다는 점이다. 적당히 사는 법을 배워야 오래 살 수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어디에서 어떻게 배워야 하는지는 모른다. 하여간 그런 생각으로 머리보다 몸을 움직여 몇 가지 일을 쭉 했다. 며칠 동안 생각을 해 왔기 때문에 딱히 머리를 쓸 필요가 없었다. 끝내고 나니 점심시간이 되어 라면을 사다 끓여먹고는 소파에 누워 긴 잠에 빠져들었다. 낮잠이 필요한 날이었다. 쓸데없는 생각을 많이 하는 시기라서 낮잠은 물론 밤잠도 잘 못 자고 있다. 그래도 억지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새벽에 야구 개막전을 보기 위해서라도 잘 필요가 있었다. 깨어보니 아홉시가 다 되어 있었다. 오늘도 <호박꽃 순정>을  놓쳐서 속상했다. 그래서 저녁도 별로 맛이 없었다. 내일은 금요일이지만 밖에 나가지 않기로 했다. 요즘 부쩍 밖에 나가는 일이 힘에 부친다. 늘 먼 곳을 헤매고 다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제 20일도 채 남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참으면 된다. 뉴욕과 서울을 비교하면서 서울에는 서성댈 곳이 없다고 불평하는 글을 읽었는데, 글을 쓴 이는 뉴욕은 잘 알지 몰라도 서울은 잘 모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몇 편 읽지 않았는데 그 글은 늘 ‘뉴욕>서울’로 끝난다. 뉴욕에는 뉴욕의 매력이, 서울에는 서울의 그것이 있다. 읽고 읽지 않고는 각자의 의지에 달렸다. 게다가 내 생각에, 서성대는 건 마음이지 공간이 아니다. 서성대기 위해서는 그러기 좋아하는 마음이 공간보다 더 절실하다. 한참 밀렸던 재활용쓰레기를 여러 보따리 내다 버렸다. 속이 조금 후련해졌다. 내가 사랑하는 4월, 올해의 4월은 버리는 달이다. 쓰레기도 버리고 뱃살도 버려야 한다. 해태마트까지 걸어가서 코크 제로를 사 마셨다. 라면과 콜라를 한꺼번에 먹은 놀라운 날이었다. 집에서 마트까지 걸어가는 2분의 시간동안 이 동네의 조용함이 갑자기 마음에 들었다. 그렇다고 여기에 계속 머무르고 싶은 건 아니다. 나는 떠나야 한다. 멀리 떨어져야만 한다. 나는 가까이에 있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잘 못 읽는 사람이므로. 그래서 언제나 밀쳐버리고 아쉬워한다. 결국 더 좋아할 것 같은 것들은 가까이 두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새로 살게 될 동네가 조용하기만을 그저 바란다. 나는 구태의연한 존재가 되어버렸지만 내 삶에는 새로와질 수 있는 구석이 남아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래도 새롭게 살고 싶다. 구태가 뼛속까지 배어버린 몸이야 가망없지만 어떻게 마음만이라도.

 by bluexmas | 2011/04/01 01:16 | Life | 트랙백 | 덧글(6)

 Commented at 2011/04/01 07:59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11/04/05 06:34

언제나 너덜너덜합니다. 사는 건 뭐…

 Commented at 2011/04/01 08:08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11/04/01 17:27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번사이드 at 2011/04/03 00:19 

좋아하신다니 ‘호박꽃순정’이 아주 막장 드라마는 아닌가보네요^^;

전 얼마전에 대학가쪽 커피집에서 배종옥 본 적 있습니다. 특이한 목소리가 들려서 슬쩍 보니 배종옥이더군요..연기 관련 강의를 듣나보던데, 연기 이론과 실제의 차이에 관해 토론 하더군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11/04/05 06:34

아뇨 막장입니다 크크. 배종옥이 정말 연기 잘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