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댓국에 소주 두 병
바쁜 일들을 지나보내고 나면 뿌듯해야 하는데 나는 기분이 나빠진다. 어제도 그랬다. 고통스러운 기간을 며칠 보냈는데, 그 기간이 왜 고통스러울 수 밖에 없을까 생각하니 화가 나는 것 같다. 밤을 새운 다음에는 잠을 자야 되는데 미룰 수 없는 약속이 있어 책상에 앉아 일하던 그대로 집을 나섰다. 한 번 돌아다니기 시작하니 관성이 붙어 집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가 어려웠다. 결국 거의 다 와서는 우회, 선유도에서 순대국을 놓고 소주를 마셨다. 한 병만 마셔야 하는데 두 병째를 따서, 반 병은 식당 사장에게 떠넘기고 나머지를 싹싹 비운 뒤에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소주를 거의 마시지 않지만 마시는 날마다 십여 년전 모 대기업 입사 오리엔테이션에서 만났던 인사과 직원이 생각난다. 그는 ‘야근하고 한 잔 마시는 소주가 인생의 낙’이라는 식으로 말했다. 그때 나는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술 말고 다른 건 없을까, 소주 말고 다른 술은 없을까. 십년도 훨씬 더 지나고서야 나는 그를 이해한다.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이제서야 알았다. 나는 어렸고 또 그래서 부족했다. 그래서 그에게 미안하다. 소주를 마실때마다 그에게 미안하다. 그래서 소주를 잘 마시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때 그는 과장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조직에서 살아남았다면 이사쯤은 되지 않았을까. 어쨌든,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집 앞 수퍼에서 돼지바를 사먹고는 술김에 봉지를 아무데나 버렸다. 부끄러웠다. 나는 참으로 돼지같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것도 부끄러웠다.
# by bluexmas | 2012/03/07 10:02 | Life | 트랙백 | 덧글(12)
쓸쓸한 내용이지만 담백한 문장에 맛있게 읽어내려왔습니다.
어른의 맛이 나네요
기운내세요 bxm님 : )
식단 조절이 끝나면 얼굴한번 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