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두콩을 찾아 나선 오후
뭉개고 또 뭉개다가 진절머리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운동을 하고 대강 점심을 챙겨 먹은 시간이 오후 세 시, 장가방을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완두콩을 찾아서. 어제 하루 종일 집에 있다가 아버지의 다급한 구조요청에 파워포인트와 PDF를 봐드리러 세수도 안 한 채로(사실은 써야될 수건까지 실수로 모두 빨아서 저녁이 될 때까지 샤워를 하지 못했다) 본가에 들렀다 돌아오는데 그쪽 아파트 단지에 열린 장에서 완두콩 자루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철도 된 듯… 사다가 쪄먹으면 맛있겠다, 소금 넉넉하게 쳐서, 그렇지 않아도 맥주 안주로 계속 열량이 높은 것만 먹어서 신경이 쓰이는데 콩이라면… 이라는 생각을 했으나 아파트 단지에 열리는 장을 워낙 싫어하는지라 선뜻 지갑을 열 수 없었다. 저 장에 나왔으니 진짜 장에 가면 더 좋은 걸 살 수 있겠지, 라고 생각했고 결국 그 생각에 집을 나선 것이었다.
날씨는 덥고 공기 속에는 무엇인가 사람을 불쾌하게 만드는 뿌연 입자 따위가 가득한 느낌이었다. 완두콩 말고도 야채가 하나도 없어서 뭔가 날로 먹을 수 있는 종류를 사야만 했다. 부모님과 장을 같이 봐서 나누면 좋기는 한데, 나 혼자 느긋하게 장보기를 즐길 수가 없다. 이것저것 생각하고 또 즉흥적으로 무엇인가를 사는 재미는 사실 혼자가 아니면 누리기가 힘들다. 또 바쁘면 어렵고…
시장으로 가는 길은 이제 낯익어서 눈을 감고도 다닐 수 있어요, 라고 감히 거짓말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좁은 동네니까. 나는 아직도 여기에 살고 있다는 느낌이 안 든다. 그냥 어딘가에 콘도를 빌려서 잠시 머무는 것 같다. 짐도 없어서 더 그렇다. 아직까지는 이 좁은 동네도 신기하지만, 어째 곧 지겨워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계속해서 들었다. 나라는 사람이 워낙 그렇게 생겨먹었으니까.
장 어귀에 들어섰는데 어느 가게에도 완두콩 비슷하게 생긴 것조차 없어서 예감이 불길했다. 일단은 장에 딸린 수퍼마켓에 들어가봤다. 사실은 아무 생각없이 들어간 건데 혹시나 해서 마주앙을 찾아보았다. 사치의 탈을 쓴 싸구려 와인이 마실 수 없는 놈들이라면 정말 싸구려 다운 싸구려는 어떤 맛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 앞 수퍼마켓에서는 만 이천원 가까이였는데 병당 채 만원도 안 했다. 맛은 어떨까…
부모님과 함께 왔을 때 들렀던 가게들을 기억해내서 오이와 시금치를 샀다. 두 야채 모두 들렀던 가게들에서 가장 싱싱해보였다. 웬만하면 가게보다는 할머니들 좌판에서 사는게 더 좋기는 한데 물건도 별로고 또 나 같은 애들한테는 바가지를 씌우기도 하니까. 어쨌든 그렇게 장을 한바퀴 다 돌았는데 딱 한 군데의 가게에서 완두콩을 발견했으나 상태가 너무 안 좋아보여서 곁을 지나가면서 슬쩍 곁눈질만 하다가 포기했다. 아무래도 제철이 아닐지도 모르니 어머니에게 물어보기로. 돌아오는 길에는 이마트에 들러 고추씨 기름을 샀으나 정작 음식 만들 때에는 잊어버리고 넣지 않았다. 저녁에 시금치와 오이를 씻어 먹었는데 시금치는 약간 억셌고 오이에는 살짝 쓴 맛이 돌았다.
# by bluexmas | 2009/05/07 00:08 | Life | 트랙백 | 덧글(5)


비공개 덧글입니다.


그러고 보니 더덕도 있어요. 역시 초고추장에 무쳐 드시면… 전 구운 것보다 생 더덕을 더 좋아해요.